쇼펜하우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하다.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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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펜하우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하다.
    인물 이야기 2017. 7. 18. 20:04

     

     

    쇼펜하우어,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하다.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독일어: Arthur Schopenhaue) 1788년 2월 22일 ~ 1860년 9월 21일)는 독일철학자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이 칸트의 사상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칸트의 사상을 올바르게 계승했다고 확신했다. 당대의 인기 학자였던 헤겔, 피히테, 셸링 등에 대해서는 칸트의 사상을 왜곡하여 사이비이론을 펼친다며 강력히 비판했다. 쇼펜하우어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충족이유율의 네 겹의 뿌리에 관하여>는 철학(인식론)의 고전이 되었다. 20대의 젊은 나이 때부터 수년 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쓰기 시작하여 1818년에 출간하였다. 대학강의에서 겔과 충돌한 후 대학교수들의 파벌을 경멸하여 아무런 단체에도 얽매이지 않고 대학교 밖에서 줄곧 독자적인 연구활동을 지속하였다. 이후 자신의 철학이 자연과학의 증명과도 맞닿아 있음을 <자연에서의 의지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주장했다. 그 뒤에 윤리학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 출판하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출판된 지 26년이 지난 1844년에 개정판을 출간하였다. 이후 <여록과 보유>라는 인생 전반에 관한 수필이 담긴 책을 출간했고 이 책은 쇼펜하우어를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1820년 대에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를 통해 힌두교와 불교에 관해 알게 되었다. 이 종교들의 핵심교리 속에 자신과 칸트가 도달한 결론과 같은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먼 과거의 동양 사상가들이 서양과는 전혀 다른 환경, 언어, 문화 속에서 근대적인 서양철학의 과제에 대해서 같은 결론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발견을 쇼펜하우어는 글로 써서 남겼고 서양에서 최초로 동양철학의 세련된 점을 독자들에게 알려주었다. 쇼펜하우어는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간의 유사성을 말한 철학자이자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노골적으로 표명한 독창적인 철학자로 손꼽힌다. 19세기 말에 유행하여 수많은 사상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에피소드

    25세의 쇼펜하우어는 어머니의 살롱에서 만난 인물 중에 괴테에게 가장 매혹되었다. 이들의 만남은 예나의 어느 연회장에서 이루어졌다. 연회에 참석한 여성 몇몇이 쇼펜하우어를 놀려대며 구시렁대는데도 쇼펜하우어는 고민하는 표정을 지은 채로 사색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때 고상하게 보이는 괴테가 킥킥대는 여성들에게 다가가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여성들의 대답을 들은 괴테는 이렇게 타일렀다. "쇼펜하우어를 그냥 나둬.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도무지 범접할 수 없을만큼 위대해질 테니까" 괴테는 쇼펜하우어만 자신의 집으로 조용히 불러서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괴테를 매우 존경했고 괴테는 쇼펜하우어에 대해 "속을 알 수 없는 인물"로 생각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오랜 세월 동안 과민한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쇼펜하우어가 6살이던 시절에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서럽게 우는 아들"을 산책에서 돌아온 부모님이 발견했다. 왜냐하면 부모가 자신을 집에 버리고 떠났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또한 성인 시절에는 밤에 잠자다가 미미한 잡음만 들려도 벌떡 일어나서 권총을 집어들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수염을 면도해주는 이발사를 전혀 신뢰하지도 않았었다. 전염병에 민감하여 결벽증도 있었던 것 같다. 외식하러 갈 때도 다른 사람들이 사용한 잔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준비한 잔을 가져가서 사용했다. 자신의 재산 관련 계산서나 수표에도 결코 독일어를 쓰지 않았다. 자신의 지출내역 관련 기록은 영어로 기록했고 자신의 사업서류들을 그리스어나 라틴어로 쓰기도 했다. 자신의 귀중품들을 비밀장소에 숨겨뒀고 강도를 피하려고 가짜이름표를 만들어 붙이기도 했다. 자신의 채권들을 엉뚱한 문서에 숨기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이런 성향을 인정하고 절망하기도 했고 졸렬한 인간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이것은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인 성향으로 추정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동안 고전철학과 고전문학을 집중해서 읽었다. 철학서적과 과학서적이나 문학을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읽었다. 이탈리아 작가들 중에는 단테, 아리오스토, 마키아벨리 등도 좋아했지만 특히 페트라르카를 가장 좋아하며 그의 시는 무척 감명깊게 읽었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어떤 책에 대한 피상적인 해설서나 번역서들을 경멸했다. 그러면서도 쇼펜하우어 본인은 번역을 즐기기도 했는데 괴테의 파우스트구절을 영어로 번역하여 호평을 받기도 했다. 세르반테스돈키호테를 스페인어로 읽었고 스페인 작가 발타자르 그라시안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헤겔같은 교수들이 영국 사상가들의 책을 제대로 연구도 안하며 엉터리 번역서나 참고하는 사기꾼들이라고 비난할 정도로 번역을 혐오했던 것은 사실이다.

    쇼펜하우어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던 로베르트 호른슈타인이라는 음악가가 1855년에 쇼펜하우어 자택을 방문했다. 이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의 제자인 젊은 작곡가였다. 나중에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에 대한 회상》이라는 책을 남겼다. 호른슈타인은 이 책에서 스승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게 얼마나 빠져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그렸다. 호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바그너가 쇼펜하우어에 대해 말할 때와 같은 열정으로 다른 예술가나 예술분야의 권위자들을 칭찬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쇼펜하우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살 때였다. 소설가 '요한나 쇼펜하우어'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동네 주민들에게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청년시절부터 입어 온 유행이 지난 외투를 입고 다녔다. 이런 쇼펜하우어의 독특한 모습과 쇼펜하우어의 애완견인 푸들 '아트만'은 프랑크푸르트의 명물이 되었다. 쇼펜하우어는 항상 이런 식의 차림으로 애완견을 데리고 다니며 산책을 했다. 칸트의 성실한 산책 이야기가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었듯이 애완견과 같이 산책하는 쇼펜하우어의 모습이 마치 인격이 좋은 주인과 충직한 애완견처럼 보여서 유명해졌다.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날씨가 나빠도 왠만하면 평안한 기분으로 일정한 시간 동안 산책을 꼬박꼬박 했다. 쇼펜하우어는 큰소리로 혼잣말을 하면서 걸어다닐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에 길을 걷던 동네 주민들은 가끔 의아한 표정으로 뒤돌아보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거의 매일 점심밥을 먹고 나서 플루트를 불었다고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의 저서 《선악의 피안》에서 쇼펜하우어와 플루트에 대해서 언급했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이 사실은 쇼펜하우어가 청년 시절부터 악보를 술술 읽고 모차르트 음악 연구에 몰두한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음악의 형이상학'이라는 형식으로 자신의 음악철학을 논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바그너는 베토벤 기념 논문인 '베토벤'에서 이렇게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음악이 문학이나 조형예술 등과는 전혀 다른 특징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철학적으로 명쾌하게 음악이 다른 예술분야들 사이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이렇게 썼다'

    덴마크의 사상가 키에르케고르의 '절망'이라는 말과 쇼펜하우어의 '고뇌'라는 말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말년에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알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가 남긴 많은 일기 속에는 쇼펜하우어의 사상에 대한 감격적인 글들이 남아있다. 키에르케고르의 《순간》이라는 책에는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헤겔에 대한 비판, 맹목적인 낙천주의, 근대과학의 오만함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것은 키에르케고르와 쇼펜하우어의 공통점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죽기 2년 전에, 그러니까 1853년 정도에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었다고 한다.

    1850년대 중반의 일이다. 독일 브레슬라우대학교의 켈바 선생은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자연과학의 관계'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에서도 쇼펜하우어에 대한 비평과 책들이 출판되었다. 영국에서는 쇼펜하우어 책의 일부가 편역되어 떠돌았고 프랑스에서도 번역본이 나왔다. 특히 쇼펜하우어의 철학서적 보다는 통속적이고 명쾌한 문학적 재치가 돋보이는 '여록과 보유'라는 책이 더 인기를 끌었다. 쇼펜하우어의 자택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헤벨도 이 시기에 쇼펜하우어를 방문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존경과 칭찬의 편지를 쇼펜하우어에게 보낸 사람도 꽤 있었다. 1858년에는 쇼펜하우어의 70살 생일 잔치가 열렸고 이 때에 쇼펜하우어의 명성은 절정에 달했다. 독일 작가 테오도어 폰타네의 절친 빈케라는 사람은 쇼펜하우어에게 은으로 만든 잔을 생일 선물로 주었다. 괴테의 며느리였던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에게 책 출판에 대한 축하 편지를 썼다. 오틸리에 괴테는 쇼펜하우어의 여동생과도 친했고 쇼펜하우어가 젊었을 때부터 괴테와 더불어 쇼펜하우어를 응원해준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였다. 쇼펜하우어는 그 편지를 받고 오틸리에 괴테에게 감격에 찬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

    마그데부르크의 법률고문관으로 재직한 프리드리히 드루그트는 쇼펜하우어의 논문과 저서들에 감격하여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지인들에게 널리 알리고 다녔다. 쇼펜하우어를 찾아와 수제자가 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타트는 쇼펜하우어 사후에 유고를 정리하여 《토론의 법칙》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쇼펜하우어 전집을 출판했다. 사법관이었던 아담 도스라는 사람은 어린 나이인데도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공부했는데 쇼펜하우어는 이것에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쇼펜하우어와 의형제처럼 친하게 지냈던 변호사 빌헬름 그비너라는 사람이 있었다. 이 사람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감격하여, 먼저 찾아와 진지한 이야기를 해서 쇼펜하우어와 친해진 사람이었다.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의 유언을 집행했고 쇼펜하우어 집안의 유산을 유언에 따라 잘 처리하기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평평한 화강암을 이용해 묘비를 만들어 줄 것을 생전에 희망했고 묘비에다가 자신의 이름 빼고는 아무것도 적지마라고 말했다. 이후에 그비너는 쇼펜하우어에 대한 전기를 최초로 쓰기도 했다. 이 시기에 조각가 엘리자베스 네이가 찾아왔는데 쇼펜하우어는 대리석으로 만들 흉상의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을 받았다. 이 흉상을 보고 쇼펜하우어는 만족스러워 했다. 이 흉상의 진품은 현재 미국 텍사스 주 오스틴 시의 네이미술관에 있다.

    어느날 쇼펜하우어는 폐렴 증세가 있었으나 평소대로 일찍 기상하여 쾌활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가정부는 항상 그랬듯이 집안을 환기시키느라 창문을 열어놓고 집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몇 분쯤 지나서 거실로 들어온 주치의는 소파에 등을 기대앉아 차분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쇼펜하우어를 발견했다. 1860년 9월 26일 쇼펜하우어의 시신이 안장된 무덤 앞에서 거행된 장례식의 참가인원은 별로 없었으나 그의 추종자들이 모였다. 어느 개신교 목사가 장례식을 주관하며 추도문을 낭독했고 이어서 쇼펜하우어의 절친인 빌헬름 그비너가 준비한 추도문을 낭독했다.

     

    "한 세대가 지나도록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함께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낯선 이방인으로만 여겨지던 이토록 희귀한 고인의 관은 실로 비상한 감회들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자리에 서있는 누구도 고인의 혈육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고인은 혼자있기를 좋아하며 살았고 고독하게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지금 고인의 앞에있는 무엇이든지 그렇듯이 일평생 고독을 감내한 고인을 이토록 뒤늦게나마 위로해줄 수 있기를 삼가 기원합니다. 우리가 '죽음의 캄캄한 어둠에 파묻혀 외롭게 방치되는 친구나 적을 바라볼 때에도 우리의 눈은 즐길 수 있는 향락거리를 찾기도 하지만 우리의 다른 모든 감정은 '생명의 원천들을 알고자 하는 욕망' 속에서 소진됩니다. 지식은 고인과 언제나 함께하면서 고인을 장수하도록 도와준 친구였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대하고 진지하게 진리를 추구한 고인은 어렸을 때부터 세상의 껍데기같은 외면들을 무시했을 뿐더러 그러한 자신의 태도가 자신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킬 가능성마저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열정적인 심장을 지닌 이 심오한 사상가는 흥겹게 놀다가 돌연히 성난 아이처럼 일평생 쉬지않고 내달리면서 고독했고 오해받았으되 스스로에겐 진실하기만 했습니다. 타고난 재능과 더불어 그것을 발휘하는 데 필요한 교육마저 충분히 받은 고인의 모험을 방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고인은 자신이 누리던 그런 (특히 아버지로부터 받은)특혜에 언제나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고인의 유일한 소망은 그런 특혜에 보답하는 것이었고 그런 소망을 실현하기 위한 사명을 추구하느라 평생 애썼습니다. 고인은 세상에서 설정했던 목표를 오랫동안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고인의 이마에 씌워진 월계관은 고인의 인생이 황혼에 접어들고나서야 비로소 고인에게 수여된 것입니다. 고인의 확고한 신념은 애초부터 고인의 영혼에 뿌리박힌 것이었습니다. 고인은 오랜 세월 동안 남들에게 무시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고결한 길을 걸었고 거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인은 에스드라스(Esdras)에 기록된 '진리는 다른 모든 것보다도 위대하고 우월하다'는 명제를 명심하여 고생하다가 어느덧 백발 노인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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