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칸트의 증명에 대한 비판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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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펜하우어, 칸트의 증명에 대한 비판
    인물 이야기 2017. 7. 21. 23:34

     

     

    쇼펜하우어, 칸트의 증명에 대한 비판

     

    쇼펜하우어는 인식에서의 선천성에 대한 칸트의 발견을 형이상학에서의 위대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칭송한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성립하는지에 대해서는 칸트의 철학에서 설명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직관이 주어진다고 할 뿐 그것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않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칸트가 인과법칙을 직관과 무관한 오성의 원칙으로 간주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칸트는 외부사물이 인과법칙의 적용 이전에 이미 지각된다고 생각함으로써 결론적으로 경험적 직관의 성립을 전혀 설명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법칙의 선천성에 대한 칸트의 증명도 객관적-경험적 직관 자체의 가능성으로부터 도출하는 유일한 증명방법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오류를 범한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박사논문 23절에서 인과개념의 선천성에 대한 칸트의 증명을 다음 세 가지 논점을 통해 비판한다.

    첫 번째,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따르면 지각의 계열은 모두 사건이며 인과법칙에 관련되지 않고도 객관적 계열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집에 대한 지각과 강을 따라 내려오는 배에 대한 지각에서 지각의 계열은 바뀔 수없는 객관적 사건인 반면에, 집에 대한 지각에서 그 계열은 자의적으로 규정되므로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쇼펜하우어는 두 경우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집에 대한 지각과 강을 따라 내려오는 배에 대한 지각은 모두 주관에 의해 그런 것으로서 인식된 실재적인 객관들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므로 객관적 인식이라는 것이다. 유일한 차이는 배에 대한 지각에서 변화는 강과 배, 두 물체간에 일어난 것이지만 집에 대한 지각에서는 변화가 관찰자 자신의 신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여기서 관찰자의 신체도 객관적 물체계의 법칙에 놓여있는 것이므로 배에 대한 지각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신체의 움직임도 경험적으로 지각된 한 사실일 뿐이기 때문이다.

    두 인식 모두 객관적 물체계의 법칙에 놓여있는 두 물체의 서로에 대한 위치의 변화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다. 사건이냐 아니냐는 점에서 내가 한 무리의 군인들 곁을 지나가든 그들이 내 곁을 지나가든 어떤 차이도 없듯이, 관찰자의 눈이 지붕에서 바닥으로 움직이는 것과 바닥에서 지붕으로 움직이는 것은 둘다 사건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경험적 직관의 계열이 다른 객관들의 작용의 계열에 의존하므로 객관적이라는 것이다. 즉 경험적 직관의 계열은 모두 객관들 사이에서 직접적으로 주관의 자의와 독립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주장이 결과적으로 표상들의 계열을 주관적 표상들의 변화로부터 구분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칸트의 표상들의 어떤 계열도 현상의 변화로서 단순한 주관적 표상들의 변화로부터 구분되지 않고, 오직 인과법칙을 통해서만 변화의 객관성이 인식된다고 주장했으므로, 이 주장으로부터 우리가 시간 속에서 원인과 작용의 연속을 제외한 어떤 연속도 객관적인 것으로서 지각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각된 다른 모든 현상의 연속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우리의 자의에 의해 그렇게 규정된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상들은 서로로부터 결과로 발생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서로서로 뒤따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변화는 정확히 원인의 대열의 연속에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연속에서 지각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연속의 객관성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의 환상의 연속과 같이 자의에 의존하는 주관적 연속과는 전혀 다르다고 쇼펜하우어는 강조한다. 예를 들어 내가 집 문 앞에 서자마자 지붕에서 벽돌이 떨어져 나에게 맞은 경우에 벽돌의 떨어짐과 내가 걸어나옴 사이에는 아무런 인과결합도 없지만, 나의 각지에서 객관적으로 정해진 계열은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음악소리의 계열이나 낮과 밤의 계열도 원인과 작용으로 파악되지 않았지만 객관적으로 정해졌다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인과론이 이와 같은 객관적 계열을 환상과 구분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이를 통해 습관에 의해 인과관계가 형성된다는 의 가설도 논박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 칸트에 따르면 모든 표상의 객관적 실재성은 시간관계의 어떤 특정한 질서에서 그 표상의 위치를 인식함으로써 가능하다. 칸트의 주장과 같이 계열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모두 실제로 인과율에 대한 지식에 의존한다면, 인과법칙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불가능할 정도로 광대한 것이어야 할 거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인과 작용의 대열에서 우리가 그 위치를 인식하는 표상들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언제나 객관적인 것을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적인 객관들을 환상으로부터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을 통해 쇼펜하우어는 칸트의 주장을 반박한다. 원시사회에서 사람들은 천체운행의 법칙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낮이 밤을 따른다는 것을 알았듯이 시간계열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인과법칙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우리 인식의 선천성에 대해 지나치게 몰두함으로써 인과법칙의 선천성과 필연성을 증명하는 데 있어서 오류를 범하게 되었다고 지적한다. 칸트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계열의 현실성을 오직 그것의 필연성으로부터 인식할 것이지만, 이와 같은 인식은 원인과 작용의 모든 대열을 동시에 포괄하는 전지적인 오성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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