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레논, 비틀즈의 창립 멤버, 솔로 음반 판매량은 미국에서만 1,400만 장을 돌파하다.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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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존 레논, 비틀즈의 창립 멤버, 솔로 음반 판매량은 미국에서만 1,400만 장을 돌파하다.
    음악 이야기 2017. 7. 22. 03:45

     

    존 레논, 비틀즈의 창립 멤버, 솔로 음반 판매량은 미국에서만 1,400만 장을 돌파하다.

     

    존 윈스턴 오노 레논(John Winston Ono Lennon 존 윈스턴 오노 레넌, MBE, 1940년 10월 9일 ~ 1980년 12월 8일) 또는 출생명인 존 윈스턴 레논(John Winston Lennon 존 윈스턴 레넌)은 영국의 싱어송라이터이자 대중음악 사상 가장 성공했으며 또한 가장 영향력 있는 밴드인 비틀즈의 창립 멤버다. 그는 동료 폴 매카트니와 함께 가장 위대한 파트너십 중 하나로 간주되는 작곡 파트너십을 맺었다.

    리버풀에서 나고 자란 레논은 청소년기에 대유행한 스키플에 편승하여 그의 첫 밴드인 쿼리맨을 결성하였고 1960년에 이름을 비틀즈로 바꾸어 활동했다. 1970년 비틀즈 해체 뒤 레논은 《John Lennon/Plastic Ono Band》, 《Imagine》 등의 음반과 〈Give Peace a Chance〉, 〈Working Class Hero〉, 〈Imagine〉 등의 곡을 발표하면서 산발적인 솔로 활동을 벌였다. 1969년 오노 요코와 결혼한 후 미들 네임에 "오노"를 추가한 그는 1975년부터 아들 을 돌보기 위해 음악 활동을 중단했고, 1980년 《Double Fantasy》를 발표하면서 복귀했으나 같은 해 12월 마크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향년 40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레논의 마지막 음반이 된 《Double Fantasy》는 1982년에 열린 제24회 그래미 어워드에서 올해의 음반을 수상했다.

    레논은 자신의 반항적인 성향과 통렬한 재치를 음악, 글, 그림, 영화, 인터뷰를 통해 표현했다. 1971년 미국 맨해튼으로 이주한 뒤로 체류 전반에 걸쳐 논란이 되는 정치적 및 평화 운동을 전개했으며 그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은 리처드 닉슨 행정부가 그를 추방하기 위한 오랜 시도를 낳았고, 한편 그가 작곡한 곡들은 반전쟁 운동의 앤섬으로 채택되거나 더 큰 반문화를 구축하는데 일조한다.

    2012년 레논의 솔로 음반 판매량은 미국에서만 1,400만 장을 돌파했다. 그가 공연자, 단독 및 공동 작곡가로서 쓴 25개의 싱글이 미국 핫 100 차트 정상에 올랐다. 2002년 100명의 위대한 영국인을 묻는 BBC의 설문조사에서 8위로 선정되었고, 《롤링 스톤》이 선정한 100명의 가장 훌륭한 가수에서 5위를 차지했다. 1965년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 함께 대영 제국 훈장 5등급을 수여받았지만, 레논은 영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대한 비판의 의미로 후에 이 훈장을 반납했다. 그는 사후인 1987년 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1988년에 비틀즈의 멤버로, 1994년에 솔로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되었다.

     

    1940–1957: 어린 시절

    존 윈스턴 레논은 영국의 전쟁 시기이던 1940년 10월 9일 리버풀 산부인과 병원에서 줄리아 스탠리 레넌상선 해병이었던 앨프리드 레넌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앨프리드는 레논의 출생 당시 그 자리에 없었다. 그의 부모는 레논의 이름을 그의 친할아버지 이름 존 "잭" 레논(John "Jack" Lennon)에서 따왔고, 중간 이름 윈스턴은 당시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에서 따왔다. 레논의 아버지는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지만, 레논과 아내가 살던 리버풀의 뉴캐슬 로드로 꾸준히 일정한 생계비를 보냈다. 하지만 그는 1944년 2월 실종되어 생계비 지원이 끊겼다가, 6개월 후 가족을 돌보고자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당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밴 상태였던 레논의 어머니 줄리아는 그를 거절했다. 줄리아의 언니인 미미 스미스가 리버풀 사회복지부에 두 번을 요청한 끝에 줄리아는 레논의 양육권을 미미에게 넘겼다. 1946년 7월 레논의 아버지는 미미 스미스를 찾아가 레논을 블랙풀에 데려왔고, 뉴질랜드로 가서 살 계획을 몰래 세운다. 줄리아는 당시 남자친구 바비 디킨즈와 함께 그들을 찾아갔다. 그리고 레논의 양육권을 두고 격한 언쟁을 벌였고, 아버지는 5세의 레논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중 누구를 따라갈 것인지 선택하게 했다. 레논은 아버지를 두 번 선택했으나, 어머니가 떠나려고 하자 울면서 그녀를 쫓아갔다. 이후 아버지와는 20년간 연락이 끊겼다.

    레논은 이후부터 자식이 없던 이모 미미 스미스와 이모부 조지 스미스와 함께 멘러브 애비뉴 251번지에서 지내게 되었다. 레논의 이모는 레논에게 다양한 짧은 이야기책을 사주었고, 낙농장 농부인 이모부는 레논에게 하모니카를 사줬고 같이 십자말 퍼즐을 풀기도 했다. 줄리아는 주기적으로 레논을 방문했으며, 레논은 11살 때부터 블롬필드 로드 1번지에 살던 어머니를 자주 방문했다. 줄리아는 자신을 방문한 레논에게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들을 틀어주고, 밴조를 가르쳐 주었으며, 패츠 도미노의 노래 〈Ain't That a Shame〉의 연주법을 알려주었다. 1980년 9월, 레논은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반항적 본능에 대해 털어놓았다.

    제 마음 한편에서는 미치광이 떠버리 시인/뮤지션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면에서 받아들여지고 싶어하는 측면도 있어요. 하지만 전 제 자신을 거스를 순 없습니다 ...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폴의 부모님을 포함해서—'저 아이를 피해라'라고 할 아이였습니다 ... 부모들은 제가 문제아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챘고, 자신의 아이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거라고 생각했죠. 사실 그들 말이 맞아요, 저는 다른 친구들의 가정에 최대한의 방해를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 제게 진정한 집이 없다는 것에 대한 부러움도 이유 중의 하나였죠 ... 하지만, 사실은 저에게도 진정한 집이 있었어요. 제 가족은 다섯 명의 여성이었습니다. 다섯 분의 강인하고, 총명하며, 아름다운 여성들, 다섯 자매였어요. 그 중의 한 명이 제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는 그리 요령 있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줄리아는 막내였고, 바다로 떠나버린 남편이 있었고,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였기 때문에 정신이 없어 저를 제대로 챙길 수가 없었죠. 그리고, 전 줄리아의 언니와 살게 되었어요. 그녀들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 그리고, 이게 저의 첫 번째 페미니즘 교육이었습니다 ... 저는 다른 애들을 이런 식으로 물들이려 했어요. "부모님은 신이 아니야. 나는 내 부모님과 같이 살지 않잖아. 그래서 아는 거야."

    레논은 플리트우드에 살고 있던 7살 더 많은 사촌 스탠리 파크스를 정기적으로 방문했고, 파크스는 레논과 함께 여행을 가거나 동네 영화관에 갔다. 방학 동안 파크스는 다른 사촌 레일라 하비와 함께 레논을 방문하여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블랙풀 타워 서커스를 보러 가거나 디키 발렌타인, 아서 에스키, 맥스 바이그레이브스, 그리고 조 로스의 공연을 관람했다. 파크스는 레논이 특히 조지 폼비를 좋아했다고 말했다. 파크스의 가족이 스코틀랜드로 이사를 간 후, 이 세 명은 방학 때 함께 스코틀랜드에서 시간을 보냈다. 파크스는 "존, 사촌 레일라와 전 아주 친했습니다. 존이 9살이었을 때부터 16살이었을 때까지, 저흰 에딘버러에서 차를 타고 더네스에 있는 가족 농장으로 갔어요."라고 회고했다. 레논이 14세가 되던 해인 1955년 6월 5일에 이모부 조지는 간 출혈로 5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레논은 성공회 신자로 자랐고, 도브데일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다. 초등학교 졸업 후 1952년 9월에서 1957년까지 레논은 리버풀에 있는 쿼리 뱅크 고등학교에 다녔다. 그 당시 하비는 레논을 "태평스럽고, 유쾌하고, 마음 편하고, 활기차다"고 묘사했다. 레논은 가끔씩 직접 만든 학교 잡지 《데일리 홀》(The Daily Howl)에 만화를 그리기도 했으나, 그의 뛰어난 미술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그에 대한 보고서에 "실패의 길의 걷고 있음이 틀림없다 ... 희망이 없다 ... 교실의 광대와 다름없다 ... 다른 학생들의 시간을 낭비한다"고 적으며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2005년, 미국의 국립우편박물관이 그가 소년 시절 모은 우표 수집품을 입수했다.

    1956년, 레논의 어머니는 5파운드 10실링을 주고 값싼 개로톤 챔피언 어쿠스틱 기타를 사서 레논에게 "빌려"주었다. 대신 주문할 때에는 누나인 미미가 레논의 음악적 포부에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미 스미스의 집이 아닌 자기의 집으로 배송을 요청했다. 미미는 자신이 언젠가는 유명해질 거라 떵떵거리는 레논의 주장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며 언젠가 음악을 지루하게 받아들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종종 "기타 치는 건 아주 좋아, 존, 하지만 그걸로 먹고 살 수는 없어"라고 말했다. 1958년 7월 15일, 레논이 17세가 되던 해 그의 어머니 줄리아는 미미 스미스의 집에 방문 후 귀가하는 길에 차에 치여 사망했다.

    레논은 교육 자격 검정 시험 GCE O 레벨을 통과하지 못했고, 이모와 교장이 나서서야 겨우 리버풀 예술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간 레논은 테디 보이 의류를 입기 시작했으며, 선생님들을 괴롭히고 수업을 방해하는 걸로 유명해졌다. 결국 레논은 회화 강의와 그래픽 아트 강좌에서 연달아 쫒겨났고, 라이프 드로잉 수업에서 누드 모델의 허벅지 위에 앉는 등의 나쁜 태도로 인해 퇴학될 수도 있다고 경고를 받았다. 학년말 시험에서 떨어진 그는 친구들과 훗날 아내가 되는 신시아 파월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57–1966: 결성, 상업적 성공과 투어 기간

    1956년 9월, 15세의 레논은 쿼리뱅크 고등학교에서 이름을 따와 명명된 스키플 그룹인 쿼리맨을 결성했다. 1957년 여름, 쿼리맨은 스키플 반 로큰롤 반으로 이루어진 "영혼이 담겨진 세트 리스트"를 공연했다. 레논은 폴 매카트니를 7월 6일 울튼의 성 베드로 교회 원유회에서 열린 쿼리맨의 두 번째 공연에서 처음으로 만났고, 레논은 매카트니에게 밴드에 들어올 것을 권했다.

    매카트니는 미미가 "존의 친구들이 하류층인 것을 굉장히 의식했"으며, 레논을 방문하러 온 자신을 종종 아랫사람 대하듯 했다고 증언했다. 폴의 형제 마이크는, 자신의 아버지도 매카트니를 "곤경에 빠뜨릴"까봐 레논과 어울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중에 폴의 아버지는 포틀린 20번가에 위치한 매카트니의 집 거실에서 밴드의 리허설을 하게 도와주었다. 이 시기에 18세 레논은 자신의 첫 노래 〈Hello Little Girl〉을 작곡했고, 이 곡은 5년 후 더 포모스트가 불러 영국 차트 10위 안에 진입했다.

    매카트니는 친구였던 조지 해리슨을 리드 기타 연주자로 제안했으나, 레논은 14살이었던 해리슨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다. 매카트니는 후에 조지를 위해 리버풀 버스의 위층에서 오디션을 잡아주었고, 해리슨은 레논 앞에서 〈Raunchy〉를 연주했다. 레논의 예술학교 친구인 스튜어트 섯클리프는 후에 베이스 연주자로 밴드에 들어왔다. 레논, 매카트니, 해리슨과 섯클리프는 1960년대 초 "비틀즈"가 되었다. 그해 8월에 비틀즈는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48일간 거주하게 되었는데, 당시 공연을 위해 드럼 연주자가 급하게 필요했기 때문에 피트 베스트를 영입했다. 레논의 이모는 당시 19세였던 레논이 함부르크에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상당히 충격을 받았고, 여행 대신 미술 공부를 계속하라고 설득했다. 함부르크에서의 첫 체류 이후 비틀즈는 1961년 4월에 두 번째로, 1962년 4월에 세 번째로 체류했다. 다른 밴드 멤버들처럼 레논은 함부르크에서 지낼 때 프레루딘을 접했고, 긴 밤 공연을 위한 각성제로 암페타민 따위의 마약을 복용했다.

    1962년부터 비틀즈의 매니저를 맡은 브라이언 엡스타인은 이전에 밴드 매니저 일을 해본 경험이 없었지만, 비틀즈의 초창기 복장 양식과 무대 태도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레논은 처음에 엡스타인이 제안한 양복 차림의 전문적인 용모를 강하게 거부했으나, 결국에는 "돈만 준다면 바보 같은 풍선이라도 입어야지."라며 받아들였다. 매카트니는 섯클리프가 함부르크에 남기로 하자 대신해서 베이스 연주자를 맡기로 했고, 드럼 연주자는 베스트에서 링고 스타로 교체되었다. 비틀즈는 1970년 해산까지 4인조 체제를 형성하게 된다. 밴드의 첫 싱글 〈Love Me Do〉는 1962년 10월에 발매되었고, 영국 차트에서 17위를 기록했다. 그들은 데뷔 음반 《Please Please Me》를 1963년 2월 11일 10시간에 걸쳐 녹음했다. 그 날 레논은 감기에 걸려있었고, 이는 그 날 마지막으로 녹음된 곡 〈Twist and Shout〉의 보컬에 명백히 드러난다. 레논-매카트니는 14곡 중에서 8곡을 작곡했다. 레논은 이 때만 해도 앨범 제목 등 몇 가지를 빼곤 가사에 말장난을 넣지 않았다. 그는 "우린 그냥 노래를 썼어요 ...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단순히 노래를 쓴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가사들은 대부분 상관없었죠."라고 말했다. 매카트니는 1987년 인터뷰에서 다른 비틀즈 멤버들이 레논을 우상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작은 엘비스였습니다 ... 우리는 모두 존을 우러러보았죠. 그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또한 리더였고, 가장 재치있고 똑똑했어요.

    비틀즈는 1963년 초부터 영국의 주류시장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레논은 4월에 태어난 첫째 아들 줄리언과 함께 투어를 돌았다. 여왕과 다른 왕실 가족들이 관람한 로열 버라이어티 쇼 공연 때, 레논은 관객을 향해 다음과 같은 재담을 쏟아냈다. "다음 곡을 위해서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싼 좌석에 있는 사람들은 손뼉를 쳐주시고, 나머지 분들은 보석을 흔들어주세요." 1년 후인 1964년 2월에 비틀즈는 《에드 설리번 쇼》를 통해 미국에서 역사적인 데뷔 공연을 펼쳤고, 머지않아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비틀즈는 2년 동안 지속해서 투어를 돌면서 영화 제작과 작곡을 했다. 레논은 이 무렵 책 《그 자신의 이야기》(In His Own Write), 《일하는 스페인 사람》(A Spaniard in the Works)을 썼다. 비틀즈는 1965년 여왕 서작식에서 대영 제국 훈장(MBE)을 받았다.

    레논은 공연을 보는 팬들이 지르는 함성 때문에 노래가 묻히는 것과 밴드의 음악성이 악화될 것을 걱정하게 되었다. 레논은 〈Help!〉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건 제 진심이었어요 ... 전 'help→도움'를 부르고 있었죠." 그는 살이 불어났고(후에 이때를 '살진 엘비스' 시기에 비유했다), 무의식중에 변화를 추구하고자 하는 걸 느꼈다. 그해 3월 레논, 해리슨과 그들의 부인을 저녁 파티에 초대한 치과 의사는 몰래 커피 속에 LSD를 담아 그들에게 권했다. 그들이 떠나고자 할 때 LSD를 복용했다는 것을 밝히면서 부작용 때문에 외출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밖으로 나간 그들은 한 나이트클럽의 엘리베이터에서, 마치 불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고함을 질렀다.

    1966년 3월, 《이브닝 스탠더드》의 리포터 마린 클리브와의 인터뷰 중에 레논은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기독교 신앙은 없어질 거예요. 오그라들고 사라질 거란 말입니다 ... 우리는 지금 예수보다 인기가 많아요. 로큰롤과 기독교 중에 어떤 게 먼저 없어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발언은 영국에서는 거의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다섯 달 후인 8월에 미국의 한 잡지가 인터뷰를 공개하면서 큰 파급을 초래했다. 미국의 기독교 신자들은 비틀즈 음반을 불태웠고, KKK는 레논을 위협하거나 공연 중 난동을 부렸다. 이같은 활동은 비틀즈가 투어를 중지하겠다는 결정에 도화선을 당겼다.

     

    1967–1970: 스튜디오 기간, 해체, 그리고 솔로 작업

    1966년 8월 29일, 마지막 상업적 콘서트가 끝나고 일상적이던 라이브 공연을 뒤로한 레논은 상실감과 밴드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을 느꼈다. 지난 1월 의도치 않은 LSD 복용 이후 약물 사용이 늘어났으며, 특히 1967년에는 지속해서 영향을 받았다. 전기작가 이안 맥도널드에 의하면, 레논은 지속적인 복용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이 지워질 뻔"했다. 1967년 레논이 쓴 〈Strawberry Fields Forever〉가 발표되었고, 《타임》지는 이를 "놀라운 창의력"이라고 격찬했다. 비틀즈의 대표 음반인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의 가사는 레논-매카트니가 초기에 쓴 간단한 사랑 노래와는 큰 대조를 이루었다.

    8월에 마하리시 마헤쉬 요기를 소개받은 비틀즈는 그의 초월 명상 세미나가 진행되는 웨일스의 뱅고어에 가서 주말 개인 강습회에 참여했다. 그들은 세미나 도중에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레논은 후에 "저희가 위험에 직면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전 우리가 곡을 연주하는 것 외엔 다른 것을 할 수 없단 걸 알았고, 그 때문에 겁을 먹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해리슨과 레논은 동양 종교에 대한 흥미가 컸고, 이에 힘입어 비틀즈는 나중에 인도에서 마하리시의 아시람을 방문하여 더 많은 지도를 받았다. 거기에 있는 동안 《The Beatles》와 《Abbey Road》의 대부분 곡을 작곡했다.

    레논은 혼자서 장편 반전 영화 《존 레논의 전쟁 대작전》에 출연했다. 영화는 1967년 10월에 상영되었다. 비틀즈가 처음으로 엡스타인 없이 진행한 텔레비전 영화 프로젝트 《매지컬 미스터리 투어》는 폴 매카트니가 진행하고 비틀즈가 직접 각본 및 감독을 맡았다. 그해 12월에 공개된 영화는 평론가로부터 비틀즈 작품 중에서는 처음으로 악평을 받았으나, 레논이 루이스 캐럴로부터 영감을 얻은 〈I Am the Walrus〉를 수록한 사운드트랙은 성공을 거뒀다. 엡스타인의 사망 이후, 비틀즈 멤버들은 사업 활동에 점차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1968년에 2월 애플 레코드과 몇 개의 자회사로 이루어진 멀티미디어 기업인 애플 코어를 세웠다. 레논은 기업을 "사업 구조 내에서의 예술적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시도라고 설명했으나, 그의 늘어만 가는 마약 실험과 오노 요코에 대한 집착, 그리고 매카트니 자신의 결혼 계획으로 인해 애플은 전문적인 매니지먼트가 필요했다. 레논은 비칭 경에게 그 역할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했고 돌아가 음반을 만들라고 충고했다. 레논은 롤링 스톤스와 여러 밴드의 매니저를 맡아온 앨런 클라인에게 부탁했다. 클라인은 레논, 해리슨, 스타에 의해 애플 최고 경영자로 임명되었지만, 매카트니는 매니지먼트 계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68년 말 레논은 더티 맥의 멤버로서 《더 롤링 스톤스 록 앤 롤 서커스》에 출연했다(1996년까지 발표되지 않았다). 이 슈퍼그룹 더티 맥은 레논, 에릭 클랩턴, 키스 리처즈, 그리고 미치 미첼로 구성되었고, 오노는 영화 내에서 백 보컬을 담당했다. 레논과 오노는 1969년 3월 20일에 결혼했으며 자신들의 신혼여행 장면을 그린 14개짜리 석판화 시리즈를 선보였다. 이 중 여덟은 불건전하다고 판단되었고, 대부분 금지되거나 몰수되었다. 레논의 관심은 비틀즈에게서 멀어져, 1968년과 1969년 사이 오노와 작업한 세 개의 실험 음악 음반, 《Unfinished Music No.1: Two Virgins》, 《Unfinished Music No.2: Life with the Lions》 그리고 《Wedding Album》에 창의성을 집중시켰다. 1969년에는 플라스틱 오노 밴드를 결성하여 《Live Peace in Toronto 1969》를 발표했다. 1969년과 1970년 사이에 레논은 1969년 베트남 전쟁 반대 노래로 널리 채택된 〈Give Peace a Chance〉, 헤로인 복용 후 그의 후회하는 심정을 표현한 〈Cold Turkey〉, 그리고 영국이 비아프라 전쟁에 개입한 데 항의하는 〈Instant Karma!를 발표했다. 영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한 미국을 지원한 것과, 〈Cold Turkey〉의 차트 순위가 내려간 것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레논은 훈장을 여왕에게 반납하나, 포기할 수가 없는 MBE 상태에는 아무 영향이 없었다.

    레논은 1969년 9월에 비틀즈를 떠났고, 그룹이 녹음 계약을 재협상하는 동안에는 이를 매체에 발표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하지만 1970년 4월 매카트니가 데뷔 솔로 음반 발표와 동시에 밴드 탈퇴를 선언하자 레논은 분개했다. 레논은 "하느님 맙소사! 그가 전부 자기 걸로 만들어버렸어!"라고 반응했다. 그는 후에 "내가 밴드를 시작했고, 내가 해체했다. 그렇게 단순한 거다"라고 썼다.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폴이 한 것을 안 한 난 바보였다. 음반 파는데 그걸 이용한 거 말이다."라며 매카트니를 비꼬았다. 다른 구성원들이 오노를 향해 느끼는 적개심을 눈치챘다는 얘기도 했으며, 자신과 해리슨과 스타가 폴을 위한 "사이드맨 취급을 당했다"고 말했다. 계속해서 그는 "엡스타인의 사망 후 비틀즈는 무너졌다. 폴이 그 역할을 이어받아 우리를 이끌고자 했다. 하지만 우리는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을 뿐인데 뭘 이끌었겠는가?"라고 말했다.

     

    1970–1972: 초기 솔로 성공과 행동주의

    1970년, 레논과 오노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서 야노브 의사를 통해 원초 치료를 받았다. 유년기의 감정적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고안된 치료법으로 일주일에 두 번, 4개월간 진행되었다. 의사는 더 장기적으로 치료하기를 원했으나, 커플은 더 이상 계속 치료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런던으로 돌아왔다. 레논의 감정이 잘 표현된 데뷔 솔로 음반 《John Lennon/Plastic Ono Band》(1970)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평가 그레일 마커스는 "존이 부른 〈God〉의 마지막 소절은 로큰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업적."이라고 평가했다. 음반은 레논이 어릴 적 직면해야 한 감정이 들어간 노래 〈Mother〉, 부르주아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노래 〈Working Class Hero〉("넌 아직도 망할 하류층이야"라는 가사로 인해 방송사들로부터 비판을 샀다) 등이 수록되어 있다. 같은 해, 레논은 타릭 알리와의 인터뷰 때 그의 혁명적 정치 견해에 영감을 받아 〈People to Power〉를 썼다. 레논은 나중에 알리의 근거없는 외설 혐의로 인해 《Oz》지가 기소되자, 이 기소를 "역겨운 파시즘"이라고 맹렬히 비판했다. 그와 오노(엘라스틱 오즈 밴드)는 싱글 〈God Save Us / Oz〉를 발매하고는 잡지사 지원을 위한 운동에 참여했다.

    레논의 다음 음반 《Imagine》(1971)은 평론가들로부터 신중한 반응을 받았다. 《롤링 스톤》은 "수록곡의 대부분이 좋은 음악"이라고 평했으나, "그의 가식은 곧 단순히 따분해질 뿐만 아니라, 시시하게 되어버릴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앨범의 타이틀 곡 〈Imagine〉은 반전 운동을 위한 노래가 되었고,How Do You Sleep?〉은 《Ram》에서 나타난 자신을 비꼬는 가사에 대한 반격으로, 매카트니는 후에 가사가 레논과 오노를 향한 공격이었다고 인정했다. 레논은 1970년대 중반에 적의를 조금 누그러뜨렸고, 〈How Do You Sleep?〉을 자신을 위해 썼다고 말했다. 존은 1980년에 "나는 폴을 향한 내 적개심을 이용하여 노래를 만들었다 ... 잔인하고 끔직하고 악한 앙갚음이다 ... 나는 〈How Do You Sleep?〉을 폴의 탈퇴에 대한 분노와 그에 대한 관계를 사용해 작곡했다. 이런 생각을 머릿 속에서 떨쳐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1971년 8월에 뉴욕으로 이사를 간 레논과 오노는 12월에 〈Happy Xmas (War Is Over)〉를 발매했다. 새해, 닉슨 정부는 레논이 주도한 반전 운동과 반닉슨 선전에 맞서 "전략적 대응책"을 취했고, 그를 추방하려는 4년의 시도에 착수했다. 1972년, 레논은 뉴욕에서 맥거번이 닉슨에게 선거에서 패한 후, 제리 루빈에 의해 열린 선거 후 행사에 오노와 참여했다. 이민 당국과의 계속되는 법적 전투에 집중한 레논은 결국 미국 영주권을 거부당했다(1976년 이후 풀렸다). 우울했던 레논은 술에 취해 여자 손님과 섹스를 하며 오노를 당혹스럽게 했다. 그녀의 노래 〈Death of Samantha〉은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뉴욕 밴드 엘리펀트스 메모리가 백 보컬을 맡고, 오노와 공동으로 제작한 음반 《Some Time in New York City》은 1972년에 발매되었다. 여성권리, 인종관계, 북아일랜드를 탄압하는 영국, 그리고 레논의 영주권 획득 문제에 관한 노래가 수록된 이 음반은 큰 혹평을 받았다. 수록곡 〈Woman Is the Nigger of the World〉은 같은 해 미국에서 싱글로 발매되었고, 5월 11일 《딕 커뱃 쇼》를 통해 전파를 탔다. 많은 라디오 방송국들이 "깜둥이"라는 단어 때문에 방송하는 것을 거부했다. 레논과 오노는 엘리펀트스 메모리, 그 외 게스트들과 함께 윌로우브룩 주 학교 정신 시설의 환자들을 위해서 두 번의 자선공연을 열었다. 1972년 8월 30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진행된 이 공연은 레논의 마지막 장시간 공연이었다.

     

    1973–1975: "잃어버린 주말"

    레논이 《Mind Games》(1973)을 녹음하고 있었을 때, 그와 오노는 떨어져 지내기로 했다. 그들은 18개월간 떨어져 지냈고, 레논은 이후 이 기간을 "잃어버린 주말"이라고 불렀다. 레논은 그동안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개인 비서 메이 팡과 함께 지냈다. 플라스틱 U.F.오노로 표기된 《Mind Games》는 1973년 11월에 발매되었다. 레논은 같은 달에 발매된 링고의 음반 《Ringo》에 가이드 보컬을 제공해 주었고, 이는 《John Lennon Anthology》에 수록되어 있다.

    1974년 초에 레논은 술을 심하게 마셨으며, 해리 닐슨과의 만취 사건으로 머리기사를 장식했다. 가장 널리 알려진 두 사건은 트루바두르 클럽에서 3월에 일어난 일이다. 첫 번째는 레논이 이마에 생리대를 놓고 웨이트리스와 실랑이를 벌인 것이고, 두 번째는 2주 후 레논과 닐슨이 같은 클럽에서 스모더스 브라더스를 괴롭히다 퇴장한 것이다. 레논은 닐슨의 음반 《Pussy Cats》의 프로듀서를 맡기로 하고, 메이 팡은 그들을 위해 로스앤젤레스 해안가에 위치한 집을 빌렸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자 녹음 세션은 엉망이 되었고, 레논은 팡과 함께 음반 작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 뉴욕으로 이사를 갔다. 4월, 레논은 믹 재거의 노래 〈Too Many Cooks(Spoil the Soup)〉를 프로듀싱했으나, 계약상의 이유로 30년이 넘게 미발매되었다. 최종적으로 팡이 노래를 제공했고, 믹 재거의 《The Very Best of Mick Jagger》(2007)에 수록되었다.

    뉴욕에 다시 돌아온 레논은 《Walls and Bridges》를 녹음했고, 이는 1974년 10월에 발매됐다. 엘튼 존이 백 보컬과 피아노를 담당한 수록곡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의 싱글은, 레논이 솔로 경력 때 발표한 것 중 유일하게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했다. 음반에서 나온 두 번째 싱글 〈#9 Dream〉은 연말 전에 발매됐다. 링고의 《Goodnight Vienna》(1974)에서 레논은 타이틀 곡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했다. 11월 28일, 레논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엘튼 존의 추수감사절 콘서트에 특별 게스트로 참여했다. 엘튼과 〈Whatever Gets You Thru the Night〉가 1위에 오르면 공연에 참가할 것이라고 서로 내기했고, 레논은 이 약속을 지켰다. 레논은 공연에서 "폴이라고 불리는 나의 떨어져 있는 오랜 약혼자의 노래."라고 소개하면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과 〈I Saw Her Standing There〉를 연주했다.

    레논은 데이비드 보위의 미국 첫 1위 곡 〈Fame〉을 함께 작곡했으며, 1975년 1월에 이루어졌던 녹음에서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맡아줬다. 같은 달, 엘튼 존은 자신이 커버한 〈Lucy in the Sky with Diamonds〉로 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여기서 "닥터 윈스턴 오'부기"라는 가명으로 참여한 레논은 기타 연주와 백 보컬을 담당했다. 오노와 다시 만난 레논은 커버 음반 《Rock 'n' Roll》(1975)을 발매했으며, 2월에 나온 싱글 〈Stand by Me〉는 미국과 영국에서 히트했고, 이후 5년 동안은 싱글을 발매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무대 출연을 ATV 스페셜 방송 《A Salute to Lew Grade》에서 했으며, 이는 4월 18에 녹음되어 6월에 방송되었다. 어쿠스틱 기타와 반주를 담당한 8인조 밴드와 함께 레논은 《Rock 'n' Roll》의 〈Stand by Me〉, 〈Slippin' and Slidin'〉(두 곡 모두 방송되지 않음)와 〈Imagine〉을 공연했다. 여기서 함께한 'Etc.'라는 밴드는 머리 뒤에 가면을 썼는데, 이는 그레이드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레논의 아이디어에서 착상한 것이다.

     

    1975–1980: 은퇴와 복귀

    둘째 아들 이 1975년 10월 9일에 출생했고, 레논은 육아에 전념하기 위해 5년간 경력에 공백을 냈다. 그달에 EMI/캐피틀과 한 계약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이전에 녹음된 노래를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 《Shaved Fish》을 발매했다. 레논은 매일 6시에 일어나 숀의 밥을 준비하고 그와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링고의 음반 《Ringo's Rotogravure》(1976)의 수록곡 〈Cookin' (In the Kitchen of Love)〉를 쓰고 6월에 녹음했다. 이는 1980년까지 그의 마지막 녹음 세션이 된다. 1977년 6월, 레논은 도쿄에서 "우리는 이보다 좋을 수 없을 결정을 내렸다. 우리는 아기에게 최대한 전념할 것이고,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고 느끼면 그 때 무언가 만들 시간을 할애하겠다."며 음악을 그만두겠다 선언했다. 이 공백기에 그는 일련의 그림을 그렸고, 자서전 요소와 그가 "미친 것"이라고 부르는 것을 혼합하여 책을 저술했다. 이 책들은 모두 사후에 출판되었다.

    레논은 1980년 10월에 싱글 〈(Just Like) Starting Over〉을 발표하며 복귀했고, 그 다음 달에 오노와 함께 공동으로 정규 음반 《Double Fantasy》를 발표했다. 이 음반에는 6월에 43피트 크기의 항해선을 타고서 버뮤다를 여행하는 동안 쓴 곡들이 수록되어 있다. 수록곡은 레논이 새롭게 안정된 가족을 가짐으로서 느끼는 만족감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충분한 곡들이 다음 음반 《Milk and Honey》를 위해 녹음됐다(사후인 1984년에 발표됨). 《Double Fantasy》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멜로디 메이커》는 "정말 무미건조하다 ... 심하게 하품나온다"고 평했다.

     

    1980년 12월 8일: 죽음

    1980년 12월 8일, 오후 10시 50분경(EST) 레논과 오노는 뉴욕에 위치한 다코타 아파트에 돌아왔다.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은 아파트의 아치에서 레논의 등을 향해 총으로 네 발을 쐈다. 레논은 근처에 있는 루즈벨트 병원 응급실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도착 시간인 11시경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그 날 저녁, 레논은 채프먼을 위해 《Double Fantasy》에 싸인을 해 주었다.

    오노는 그 날 "존을 위한 장례식은 없다"고 말했고, "존은 사람들을 사랑했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부디 그를 위해 똑같이 기도해주세요."라고 끝맺었다. 레논의 시신은 뉴욕 시 하츠데일 펀클리프 묘지에서 화장되었다. 오노는 레논의 재를 뉴욕 센트럴 파크에 흩뿌렸으며, 그곳에는 후에 스트로베리 필즈 기념비가 만들어졌다. 채프먼은 2급 살인죄로 유죄를 인정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6년, 그의 9번째 가석방이 거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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