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도 위작 사건 및 천경자의 평판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다.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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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인도 위작 사건 및 천경자의 평판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다.
    미술 이야기 2017. 8. 11. 03:10

     

     

    미인도 위작 사건 및 천경자의 평판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다.

     

    평판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여자로서는 팔자가 센 것으로 비친 천 화백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삶과 예술세계를 이렇게 풀이한다.

     

    내 과거를 열심히 살게 해 준 원동력은 '꿈'과 '사랑'과 '모정' 세 가지 요소였다고 생각한다. 꿈은 그림이라는 예술과 함께 호흡해왔고, 꿈이 아닌 현실로서도 늘 내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해 준 것이 사랑과 모정이었다.

     

    배우 윤여정은 '가락 있는 멋쟁이 화가 천경자 선생님'이란 제목의 글에서 "1976년 뉴욕 맨해튼에서 전라도 사투리가 그렇게 어울리는 멋쟁이를 처음 봤고 그가 곧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눈치 챌 수 있었다"고 적었다.

    방송인 황인용은 방송을 통해 화백을 여러 번 인터뷰했다고 말했다. 남도 억양이 있는 민요 자락과도 같은 목소리, 이국적인 액세서리 등으로 천 화백을 기억했다.

    시인 고은은 "천경자는 누구인가. 그는 그것밖에 어떤 것도 될 수 없는 천형(天形)의 예술가다."라고 말했다.

    시를 많이 쓰지는 않은 소설가 박경리는 오랜 지기인 천경자를 '고약한 예술가'로 부른 시 '천경자를 노래함'을 통해 천 화백의 성품과 기질을 소개했다.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 갈 수도 없고/ 매일 만나다시피했던 명동시절이나/ 이십년 넘게/ 만나지 못하는 지금이나/ 거리는 멀어지지도/가까와지지도 않았다// 대담한 의상걸친/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허기도 탐욕도 아닌 원색을 느낀다.// 어딘지 나른해 뵈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그의 언어를 시적이라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 바람은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세간에선 천 화백의 삶을 프리다 칼로에 비유하기도 한다. 고통받은 내용은 달랐지만 한과 고독으로 점철된 그의 슬픈 전설의 페이지에도 사랑에 대한 아픔, 삶의 비애가 끊이지 않았다.

     

    인간관계

    천경자는 큰 키에 파격적인 색깔과 무늬의 옷, 위태로울 정도로 뾰족했던 하이힐, 머리를 둘러싸는 커다란 화관이나 얼굴을 감싸는 커다란 선글라스, 가늘게 그린 눈썹과 붉게 칠한 입술, 담배를 문 모습으로 주변을 압도했던 스타였다. 반달형의 눈과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당대의 패션리더이기도 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마다하지 않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담긴 입담을 자랑한 그는 같은 시대를 살던 문인ㆍ화가들과도 진한 우정을 나눴다. 김환기, 박고석, 최순우, 김흥수, 유영국, 김현승, 고은 등의 남성 예술인과 박경리, 한말숙, 전숙희 등 여성 문인들과 단짝이었다. 또 세대를 뛰어넘어서는 이덕화, 조용필, 고바우 김성환, 강부자, 김수미 등 연예인들과 함께한 시간들도 사진으로 남아있다.

    만화가 김성환은 "(천 화백 작품은) 선 하나하나가 다 살아있는 선"이라며 "그림을 보면 정신이 번쩍 난다"고 표현했다. 가수 조영남은 "천경자 화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는데도 항상 소녀 같은 어른이었다"고 추억했다. 배우 김수미는 "한번 붓을 잡으면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워서 참는다'고 했다"며 천 화백의 그림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전했다.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사건

    천경자 <미인도>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으로 진위시비는 1991년에 있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움직이는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원작을 복제해 판매하던 중 복제에 의구심을 가진 작가가 원작을 직접 보고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천경자의 위작 주장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진위를 가리기 위해 X-ray, 적외선, 자외선 촬영등 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였고, 한국화랑협회 미술품감정위원회는 1991년 4월 11일 진품이라고 판정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앞으로 위작임을 확증할 수 있는 증거가 밝혀지면 받아들이겠다"는 단서를 붙인 끝에 진품임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천경자 화백은 상당한 정신적 피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사건 직후 예술원 회원직을 사퇴하고 전시회 출품 등 작품공개 활동을 중지하겠다고 선언하고 미국으로 갔다. 이후 대규모 회고전을 가진 적은 있으나 신작은 보기가 어려워졌다.

    <미인도>에 대한 논란은 1999년 고서화 위조범 권춘식이 자신이 미인도를 위조했다고 증언함으로써 논란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은 작품입수 시점과 위조했다고 진술한 시점이 불일치하고, 위조자가 수묵화 위조 전문이어서 천경자 화백의 채색화를 위조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기존 입장을 고수하였다. 검찰에서는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더 이상 어렵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2016년 11월 프랑스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감정단은 위작 논란에 휩싸인 '미인도'에 대해 사실상 천 화백의 작품이 아니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검찰 측에 제출했다. 그러자 11월 4일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의 미인도 감정 결과 보도에 대한 입장' 자료를 내고 프랑스 감정단이 천경자의 '미인도'에 대해 위작 의견을 낸 것과 관련해 "화면 표층 분석만으로 성급히 결론을 내렸다"고 강하게 반박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프랑스 감정단이 감정 개시 전 브리핑에선 캔버스 화면의 층위조사를 통해 보이지 않는 이미지와 붓질, 작업방식 등의 패턴을 종합적으로 규명한다고 했으나 조사 결과를 보면 당초 공언한 바와는 반대로 극히 일부 자료에 대한 통계적, 인상적 분석 결과만 내놨다"고 주장하며 프랑스 감정단의 결론을 강하게 부정했다.

     

    사망시기 논란

    1998년 미국으로 이주해 2002년부터 뉴욕에 거주하였으나 현재는 천경자의 행적이 묘연하고 근황이 알려지지 않자 생존여부에 관해 미스테리라고 표현하는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대한민국예술원은 천경자 화백의 근황이 확인되지 않는다며 2014년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잠정 중단했다. 천경자 화백 가족은 이에 반발하여 탈퇴서를 제출했다. 첫째 딸 이혜선은 나머지 가족이 천경자 화백 생전에 수 년간 안부전화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천경자 화백의 둘째 딸과 둘째 사위는 첫째 딸이 어머니의 죽음을 숨겼다고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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