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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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오사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
    역사 이야기 2018. 1. 8. 19:08

     

     

    무오사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 음력7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원인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는성종 때부터이다. 성종이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등 나라의 문물을 정비하려 인재들을 많이 필요로 하자

    이러한 인재수요를 타고 사림파가 중앙에 진출하였다.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는 주로 삼사에서 은연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날이 감에 따라 이들은 종래의 벌족(閥族)인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라 하여 무시하기에 이르렀고, 또 훈구파는 새로 등장한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여 업신여기게 되니, 이 두 파는 주의·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배격과 반목이 그치지 않았다.

     

    경과

    실록에 따르면 그 일의 발단은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적에‘극돈과 성준이 윗분의 뜻이라 하여 장차 우(牛)·이(李)의 당(黨)을 이루려 하네.’라며 다소 깔보는 투로 이극돈(李克墩)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며 올렸던 소(蔬)였다. 이극돈은 중도보수의 점잖은 관료로 사림이니 훈구니 하는 대립으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져 있었는데 김일손으로부터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받고나서 사림이란 무리에 크게 분노하였다.

    분노한 이극돈이 이에 실록청을 열어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史草)를 들여보니 자신의 모자란 점을 쓴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임에도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적 일을 들추고 있었다.

    이극돈이 보기에 그 말투 또한 그 먼젓번의 소와 별반 다를 바 없자 사림에 반감을 가지었다. 이극돈은 먼저 그와 가까운 벗인 어세겸(魚世謙)에게 “이런 무리를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고 말했으나 이극돈과 마찬가지로 중도보수 온건파였던 어세겸은 자칫하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이극돈은 어세겸에게 마음에 드는 도움을 받지 못하자 평소 알던 이 중 사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자광(柳子光)에게 이를 상의하였다.

    유자광은 평소에 스스로는 협사(俠士)라 자처하고 김일손을 비롯한 이들을 글재주만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무리들이라며 싫어하였으나 마땅한 후원자를 만나지 못해 혼자 사림과 다투던 참이었다. 이러던 참에 이극돈이라는 후원자를 만나자 “이를 말씀입니까”라며 흔쾌히 반기었고 이극돈을 징검다리 삼아몇명의 대신을 더 모아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에게 김일손의 일을 말하였다.

    신수근도 외척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자신을 업신여기는 문신들에게 불만이 있던 참에 이를 듣고 그도 연명(連名)하여 연산군(燕山君)에게 아뢰었다. 연산군(燕山君) 또한 즉위 이후로 줄곧 문사(文士)하고 신경전과 줄다리기를 벌이던 참에 유자광의 말을 듣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 여겨 죄인을 심문하라 명했다.

    유자광은 조정을 다시 여는 일이라며 심문하는 장내를 엄숙히 하고 평소 이를 벼려왔던 사림을 잡아들였다. 유자광은 심문장에 사림을 잡아오기만 하면 일이 술술 풀릴 줄 알았지만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이대로 가면 가벼운 처벌로 사림이 풀려날 것이라 여긴 유자광은 점차 초조해졌고 끝내 김종직(金宗直)을 죄인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김종직은 곧고 강직한 사림의 표본이었다. 워낙 바른 모습에 자발적인 추종자가 많은 사림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유자광 또한 그에게 감화되었던 바 있었다. 유자광은 김일손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결단을 내리고 그의 후원자의 묵인 아래 김종직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때까지 버티던 김일손도 대선배격인 김종직이 죄인이 되자 자포자기하였고 유자광은 이에 득의만만해 했다.

    득의만만해진 유자광은 이참에 김일손 뿐만 아니라 그와 반목했던 사림을 모조리 잡고자 했다. 김종직이 죄인이 된 마당에 김일손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못잡을게 있겠냐며 다른 사람들도 유자광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이미 큰 무리수를 두었다고 여긴 노사신(盧思愼)은 일이 더는 커지지 말아야 한다며 유자광을 말렸지만 사림과 오랜 반목이 쌓여있던 유자광은 노사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노사신이 계속 다른 의견을 내자 유자광은 얼굴을 붉히는데까지 이르렀고 노사신과 유자광 양자의 의견을 들은 연산군은 유자광의 손을 들어준다.

     

    처벌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로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했던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이 대거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우선 이 일파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또한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을 비방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정승조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다.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영향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실록청 당상관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숙청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져 훗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이 어려워졌으며 이는 연산군이 폐위된 까닭인 연산군의 측근정치를 가속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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