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의 사상과 신념,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다. :: 예술의 정원

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박지원의 사상과 신념,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다.
    인물 이야기 2018. 1. 18. 21:11

     

    박지원의 사상과 신념,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다.

     

    자연과학

    홍대용과 함께 땅이 평평하지 않고 원형이라는 설을 주장했다. 그는 홍대용과 함께 지구설(地球說)·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해 주자 성리학에서의 지방지정설(地方地靜說)에 반대했다. 그는 지구가 평평한 평지가 아니라 거대한 원형일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땅은 하나의 먼지와 흙으로 구성된다는 주장을 하였다. 그는 세계는 천체로부터 자연 만물에 이르기까지 객관적으로 실재하며, 티끌이라는 미립자가 응취결합(凝聚結合)하고 운동·변화하는 과정에서 우주만물이 생성된다고 주장했다. 지구가 둥근 원형이라는 박지원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양반 특권에 대한 비판

    박지원은 소설 양반전을 써서 양반의 특권과 횡포를 신랄히 풍자했다. 그는 국력의 쇠퇴, 민중의 극단적인 빈곤의 근본 원인이 양반 통치 계급제도에 있다고 생각, 양반 계급의 실상을 폭로, 비판하기 위해 양반전을 쓰기도 했다. 그에 의하면 양반은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해도 꺼리낄 것이 없으며, 선비, 글공부라는 핑계 하에 국력에 해를 입히는데도 죄를 묻지 않는 이상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늘이 백성을 낳았는데 그 백성이 넷이다. 그 중 으뜸은 사(士)로다. 양반이라고도 일컬으며 이익이 이보다 큰 것이 없다. 밭을 갈지 않고 장사를 하지 않으며, 글과 역사를 조금만 공부하면 크게는 문과에 합격하고 적어도 진사가 된다. 문과의 홍패는 두 자에 지나지 않지만 온갖 물건을 얻을 수 있으니 돈자루라고도 할 수 있다. 진사는 40세에 첫 벼슬을 해도 큰 고을의 남항(南行, 음직, 음서 제도와 같은 말로. 학식과 덕행이 특출하여 추천되었거나, 가문 덕에 하는 벼슬) 수령으로 가서 잘만 풀리면 귀가 양산 그늘에 휘어지고, 배는 종놈의 대답 소리에 저절로 불러지고, 방에는 노리개로 기생을 두고, 뜰에는 명학을 기른다.'며 양반의 무위도식을 조롱했다.

    또한 시골의 선비, 혹은 낙향해서 생활하는 선비들에게도 풍자를 가하였다. '궁한 선비가 시골에 살더라도 꺼리낄 것이 없다. 이웃 소를 함부로 가져다가 먼저 밭을 갈고 마을 사람들을 함부로 불러다가 김을 매도 누가 감히 거역하겠는가? 네 코에 재를 붓고, 뜨거운 물을 붓고, 함부로 상투를 꺼들고, 수염을 뽑아도 감히 거역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정쟁에서 초연하거나 불의를 보고 낙향한 것처럼 행세하던 선비들 역시 낙향한 시골에서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고결함을 가장한 위선을 질타하였다.

    그는 인간관계가 엄격하게 신분제에 의해 규제되고 게다가 양반사회는 당론(黨論)으로 분열되어 있으며 이는 인간을 바로 보는 데 장애가 된다 하였다. 그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자유로운 교제에 바탕을 둔 평등윤리로서의 우정이 실현되기 어렵다며 신분과 붕당과 사상의 편견을 버리고 인간으로써 대할 것을 주장했다.

     

    학문에 대한 관점

    박지원은 학문이 실생활에 유용하게 쓰이지 못한다면 그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 결론하였다. 그는 학문에서 귀중히 여길 것은 실용(實用)임을 강조했다. "글을 읽고서 실용을 모를진대 그것은 학문이 아니다. 학문이 귀한 것은 그의 실용에 있으니, 부질없이 인간의 본성이니 운명이니 하고 떠들어대고 이(理)와 기(氣)를 가지고 승강질하면서 제 고집만 부리는 것은 학문에 유해롭다"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학문은 인간의 실생활에 보탬이 되는 학문이 진정한 학문이라 하였다.

    그는 학문 공부의 목적을 유민익국(裕民益國)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 하였다. 유민익국의 요체로서 생산력의 발전을 급선무라고 인식하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서는 북(北), 즉 청에서 선진 기술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는 "그것이 백성들에게 유익하고 국가에 유용할 때에는, 비록 그 법이 오랑캐로부터 나왔다 할지라도 주저없이 배워야"하며 "다른 사람이 열 가지를 배울 때에는 우리는 백 가지를 배워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이익을 주어야 한다"라고 했다. 인간에게 이롭게 하지 못하는 학문은 학문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것이라 평하였다.

     

    북벌론에 대한 비판

    그는 북벌론을 한다 하고 아무런 대책이 없는 조선의 양반 관료들을 비판하고, 복수설치의 대의를 위해 아무도 준비하지 않음을 지적하였다. 나중에 가서는 북벌론 자체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된다.

    그는 조선의 양반들이 복수설치와 북벌을 다짐하고도 무를 천시하는 점, 병력을 양성하지 않는 점, 전쟁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지 않는 점, 당쟁에 여념이 없고 음모로서 상대 정파를 죽이고 학살하는 점, 전쟁이나 유사시 피난가는데 장애가 되는 넓은 소매에 긴 옷자락을 가진 옷, 불필요하게 격식을 가진 복식 등을 지적했다. 그러나 모두 수용되지 않았고 나중에는 북벌론 자체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갖게 된다.

    청나라에서 괘종시계안경, 지구본, 망원경, 톱니바퀴 태엽으로 움직이는 시계와 기구를 목격한 이후에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기술도 뒤쳐진 조선북벌론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신, 귀신에 대한 반박

    그는 신과 귀신은 허황된 것이며 자연은 스스로 움직일 뿐이라고 하였다. 유교의 천주재설(天主宰說) 역시 미신이라며 비판하고, 자연은 자연필연성을 가지고 자기운동을 할 따름이며, 그 어떤 목적의지도 없다고 했다. 또한 신비적인 참위설(讖緯說)과 오행상생상극설(五行相生相克說)에 반대했다.그는 이런저런 재앙을 귀신의 진노로 보던 것을 허황되다고 비판했다. 그는 하늘이 어떤 뜻을 가지고 인간의 도덕적 행동에 감응한다는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과 인과 응보론에도 반대했다. 천인감응설과 인과 응보론 같은 것도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물질적 기(氣)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는 "만물이 발생함에서 무엇이나 기 아닌 것이 없다. 천지는 커다란 그릇이다. 차 있는 것은 기이며 차는 까닭은 이(理)이다. 음과 양이 서로 작용하는 그 가운데 이가 있으며 기로써 이를 싸는 것이 마치 복숭아씨를 품은 것과 같다"라고 했다. 만물의 근원은 어떤 기이고, 이는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 기의 움직임의 변화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 감각의 원천은 객관적 외부세계이며, 감각, 촉각, 의식 등은 어떤 사물이 객관적 외부세계를 느끼는 것, 감각 기관에 작용한 결과 발생한다는 견해를 선보이기도 했다.

     

    문학 세계 

    噫, 瞻彼烏矣. 莫黑其羽, 忽暉乳金, 復耀石綠, 日映之而騰紫, 目閃閃而轉翠. 然則吾雖謂之蒼烏, 可也, 復謂之赤烏, 可也. 彼旣本無定色, 而我乃以目先定. 奚特定於其目? 不覩而先定於其心.

    아! 저 까마귀를 보라. 그 날개보다 더 검은색이 없긴 하나 얼핏 옅은 황금색이 돌고, 다시 연한 녹색으로 반짝인다. 햇볕이 비추면 자주색으로 솟구치다, 눈이 어른어른하면 비취색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내가 비록 푸른 까마귀라고 말해도 괜찮은 것이고 다시 붉은 까마귀라고 말해도 상관없는 것이다. 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색이 없는데도 내가 눈으로 먼저 정해버리는 것이다. 어찌 그 눈에서만 판정할 따름이랴? 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속에서 미리 판정해 버린다.

    박지원의 문학 정신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옛것을 본받되 변화를 알고 새롭게 지어내라”는 의미다. 그는 문학의 참된 정신은 변화의 정신을 바탕으로 창조적인 글을 쓰는 데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하게 되려는 것은 참이 아니며, ‘닮았다’고 하는 말 속엔 이미 가짜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연암은 억지로 점잖은 척 고상한 글을 써서는 안 되며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대상을 참되게 그려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틀에 박힌 표현이나 관습적인 문체를 거부하고 그만의 독특한 글투를 지향했다. 이러한 그의 글쓰기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연암체’라고 불렀다. 나아가 옛날 저곳이 아닌 지금 여기를 이야기하고자 했다. 중국이 아닌 조선을, 과거가 아닌 현재를 이야기할 때 진정한 문학 정신을 구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를 일러 ‘조선풍(朝鮮風)’이라고 하는데 ‘조선의 노래’란 뜻이다.

    그는 자신의 실학 사상을 소설을 통해 생생하게 제시하고 있다. 자신이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 양반들이 실속 없이 허울 좋은 이름만 내세우는 것을 미워한 나머지 10편의 한문 소설을 지어 독특한 해학으로써 이들을 풍자하였다. 〈양반전〉은 조선 왕조 봉건사회의 와해와 그 속에서 군림하는 사(士) 계급의 올바른 개념을 정립하고 있으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위의식을 배격하면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또한 〈광문자전(廣文者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등은 양반 계층과 도학자의 도덕적 위선을 신랄하게 풍자하여 사회 개혁 의식을 제시하고 있다.

    자유로운 성정(性情)을 표현하기 위해 신문체를 수립함으로써 이덕무, 박제가 등의 한학신파의 4가를 낳게 했으며 문학을 통해 양반계급의 해체를 통찰하고 이를 비판, 새로운 현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문학은 공리공론을 배격하고 사실주의 문학을 수립했다. 청나라 문학인들과 사귀며 정치·음악·천문·경의(經義) 등에도 관심을 갖고 연경에 갔다온 기행을 쓴 《열하일기》의 대문장 26권을 이루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허생전(許生傳)>,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민옹전(閔翁傳)>, <광문자전(廣文者傳)>, <마장전>, <우상전(虞裳傳)>,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김신선전(金神仙傳)>, <열녀함양박씨전(烈女咸陽朴氏傳)> 등의 단편소설을 창작하였는데, 비록 그 표기가 한문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리얼리즘 소설의 빛나는 걸작들이다.

    그는 <양반전>을 통해 몰락해 가는 조선 사회를 풍자했으며, <호질>에서 유학자의 전형적인 위선을, <민옹전>에서 몰락해가는 무인들의 울분을 반영하여 당시 사회의 이면사(裏面史)가 되어준다. <허생전>에서는 전시대의 허균이 쓴 《홍길동전》과 함께 현실과 유토피아 세계를 교착시키며 날카로운 사회비판의 작가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설은 근대적 비판의식의 소산으로, 여러 가지 인간 유형을 통해 리얼리즘의 전통을 이룩하였고, 독특한 풍자와 해학으로써 양반계급의 무능과 위선을 고발하는 등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인물평

    박지원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의 아들인 박종채가 《과정록(過庭錄)》에서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큰 키에 살이 쪄서 몸집이 매우 컸으며 얼굴은 긴 편이었고, 안색이 몹시 붉었으며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있는 박지원의 초상화와도 거의 일치한다. 또한 박지원은 목소리가 몹시 커서 그냥 말을 해도 담장 바깥의 한참 떨어진 곳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원래 박지원 자신의 중년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가 한 점 있었지만 연암은 그 초상화가 본래 자신의 모습의 7할도 못 미친다며 없애버리게 했고, 다시 그리자는 아들의 간청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박지원은 다른 사람과 쉽게 타협을 할 줄 몰랐던 성격이었다. 김기순은 박지원에 대해 "연암은 순수한 양기를 타고 나서 반 푼의 음기도 섞여있지 않으니, 지나치게 고상해서 매양 부드럽게 억누르는 공력이 모자라고, 지나치게 강해서 항상 원만한 면이 부족했다"고 평가하고 있으며, 박지원 자신도 "일생 동안 이런 저런 험한 꼴 다 겪은 것은 모두 내 성격 탓이다", "이는 내 타고난 기질의 병이라서 바로잡으려고 한 지 오래되었지만 끝내 고치지 못했다."라고 인정하고 있기까지 하다. 실제로 박지원은 음서로 관직에 진출해 안의현감이나 면천군수 등의 관직을 지내긴 했지만, 끝내 조정의 요직에는 오르지 못했다.

     

    평가

    홍대용·박제가(朴劑家)와 함께 북학파(北學派)의 영수로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10편의 한문소설을 써 독특한 해학(諧謔)으로 고루한 양반, 무능한 위정자를 풍자하는 등 독창적인 사실적 문체를 구사하여 문체 혁신의 표본이 되었다.

     

    기타

    파격의 글쓰기로 소위 '문체반정(文體反正)'의 당사자였던 연암은 승려들과도 어울렸다. 연암과 경윤이라는 스님의 대화 중에 스님은 몇 대에 걸쳐 다듬은 승안사 미륵불을 완성하자마자 다시 없었던 일로 한다고 했다. 만들다 보니 천상 영감을 닮은 천하태평 인간의 모양새더라는 것. 부처는 부처답기를 바라는 대중이, 그 인간 모양의 미륵불을 원치 않더라는 것이다.그는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도 좋아했는데 눈 내리고 찬바람 부는 가을과 겨울에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 식도락 모임인 '난로회'를 만들기도 했으며, 제자들에게 손수 밥을 지어 먹이기도 했으며, 고령에도 직접 장을 담그기도 하였다.

     

    ☞ 연관글

    [책 이야기] - 열하일기, 박지원, 당대의 현실에 대한 고민이 절실히 녹아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