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에르, 성격 묘사에 의해서 풍속희극을 심리적으로 본격화한 걸작을 발표하다.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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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몰리에르, 성격 묘사에 의해서 풍속희극을 심리적으로 본격화한 걸작을 발표하다.
    인물 이야기 2018. 10. 30. 21:27

     

     

    몰리에르, 성격 묘사에 의해서 풍속희극을 심리적으로 본격화한 걸작을 발표하다.

     

     

    몰리에르(1622년 1월 15일 - 1673년 2월 17일)는 17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극작가이다. 본명은 장밥티스트 포클랭으로 파리에서 태어났다.

     

    초기

    1622년 1월 15일 파리의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난 몰리에르의 본명은 장바티스트 포클랭(Jean-Baptiste Poquelin)이다. 궁정 어용 옥내 장식가의 집에서 태어나 일찍이 모친을 잃었다. 대표적인 몰리에르 전기 작가 그리마레에 따르면 소년기의 장 바티스트는 당시 파리에서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클레르몽 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받으며 에피쿠로스 철학에 동조하는 가상디(Gassendi)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가업을 계승하든가 법률로 입신하라는 부친의 요구에 반항하여 피에르 가상디시라노 등 자유사상가와 교섭을 가졌다고 한다. 결국 대학에서 법률을 배워 1640년 오를레앙에서 법학사의 자격을 받았다.

    이즈음 연상의 여자 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그 일가와 교제하여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연극계에 투신한다. 1643년 '일뤼스트르 테아트르( 유명 극단)'을 결성하여 애인인 베자르를 중심으로 활동하지만 파리 상연에 실패, 채무로 투옥되는 등의 일을 겪은 뒤 베자르 자매와 함께 리옹을 비롯하여 남프랑스 각지를 약 12년 동안에 걸쳐 순회공연했다. 한편으로 샤페르와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와의 교류를 갖고, 가산디의 유물론 철학을 접하게 되며, 새로운 문학이론을 연구한다. 1645년 지방공연을 떠난 기간에 이탈리아 희극을 배워 극작을 시작하였다.몰리에르라는 예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은 1643년부터다.

    파리를 떠난 몰리에르 일행은 에페르농 공작의 후원을 받고 있던 뒤프렌(Dufresne)의 극단과 합류한다. 그의 초기 연극 활동은 지방에서 이뤄졌다. 그는 이 고난시대에 배우 및 작가로서 비극보다는 희극에서 그 특성을 발휘했다. 지방에 잔존하고 있던 중세 파르스(笑劇)의 서민적인 웃음, 당시 유행했던 이탈리아 희극의 경묘한 움직임을 연구하고 청년시대의 교양으로 고대 라틴 희극에서도 배운 바가 많았다고 한다. 이리하여 희극으로 유명해진 그는 콩티 공(公)의 보호를 받아, 1652년부터 리옹을 본거지로 삼게 되었으며, 1655년 최초의 문학적 희극 <경솔한 자>를 상연했으며 다음해에 <사랑의 유한>을 발표, 작가 겸 극단장으로서의 명성으로 루앙을 방문, 코르네유와 교분을 맺었다.

    1658년에 파리로 돌아와 루이 14세의 앞에서 <사랑에 들린 의사>를 상연함으로써 데뷔,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으로 극단은 국왕의 전속이 되었고 프티 부르봉 극장에서 이탈리아 극단과 교체로 출연할 수 있는 허가를 받기도 했다. 1659년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은 재원인 척하는 지방귀족의 딸을 풍자한 풍속희극의 소극(笑劇)으로서 대성공을 거두어 희극작가로서의 명성을 높였다.

     

    파문

    1661년부터는 극단을 데리고 파리 '팔레 루아얄(Palais-Royal) 극장'에 정착하여 이후 65년에 국왕의 전속극단이 되어 몰리에르 일생을 통한 본거지가 된다. 궁정사교계의 일부나 그가 공격한 부자연스런 낭송법에 의존하고 있던 부르고뉴 극단인 왕립극단 일파를 적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1662년에 <아내들의 학교>에서 노인 아르노르프의 딸에 대한 사랑을 통해 당시의 도덕이나 교육의 위선을 풍자, 성공과 동시에 엄청난 반대도 불러일으켰다. 이에 몰리에르는 <아내학교 비판> <베르사유 즉흥극>으로 반론하며, 경희극은 비극과 같은 가치가 있고, 법칙은 경험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지켜야 하나 구애받을 필요는 없으며, 문제는 관객의 즐거움이라고 논했다. 그 해 마들렌의 동생 아르망드와 결혼하여 그 관계에 수수께끼를 남겼다. 부부 사이의 두 아들은 일찍 죽었다.

    그 후 <타르튀프>(1664)에서 가짜 신앙가 타르튀프를 둘러싸고 오르곤 일가(一家)가 둘로 갈라져 다투어 위선의 가면을 벗긴다는 극을 썼으나 교회 일부의 반감을 사게 되어 상연금지를 당했으며 몇 차례의 개정을 거친 뒤에야 비로소 1669년에 상연의 금지령이 해제되어 일반 대중에게 공개했고 대성공을 얻었다.

    1665년에 '국왕의 극단'이란 칭호를 얻은 극단을 위하여 쓴 <돈 주앙>(1665)도 괴이성이 등장하는 소극(笑劇) 형식으로 무신론을 주장하나 작가는 양식(良識)의 신앙을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혐세자(嫌世者)>(1666)는 교만하나 고결한 인격의 아르세스트를 둘러싼 성격대립에 기초를 둔 걸작이라 하겠다. 이어서 코믹풍의 <억지로 의사가 되어>(1666)와 그리스의 신화를 소재로 한 <앙피트리옹>(1668) 후에 구두쇠 알파곤의 좌절을 묘사한 <수전노>(1668), 지나치게 재치가 있는 여인의 기질을 풍자한 <여학자>(1672) 등 모두가 성격 묘사에 의해서 풍속희극을 심리적으로 본격화한 걸작을 발표했다.

    이 사이에 무용극이나 오페라로 인기가 옮아 갔기 때문에 음악가 륄리와 협력하여 이 분야의 작품도 썼다. <서민 귀족>(1670)은 그 대표작이라 하겠다. 1665년경부터 그는 과로로 인해 폐결핵이 발병, 67년부터 오토유에서 정양하면서 연극활동을 계속했다. 1671년에는 <스카팽의 간계>, 1672년에 <여학자들> 등을 상연하였다.

    1672년에 마들렌 베자르의 사망, 이어 둘째 아들까지 요절하고 륄리에게 국왕의 총애를 빼앗기는 불운한 해가 거듭되었으며, 1673년에 <상상병 환자>를 상연 중 무대에서 쓰러져 각혈한 끝에 그날 밤 사망하고 말았다. 그 당시 배우직은 파문을 당했었으나 국왕의 배려로 장의(葬儀)를 허가받았다.

     

    죽음

    몰리에르는 《상상병 환자》를 공연 하던 중, 무대에서 사망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무대에서 쓰러져서, 그의 집에서 몇 시간 뒤에 조병성사없이 사망하였다. 두 명의 가톨릭 성직자는 그를 방문하는 것을 거절했고, 세 번째 성직자는 너무 늦게 도착하였다. 마지막에 그는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이 때문에 초록색이 배우들에게 불운을 몰고 온다는 미신이 생기게 되었다.

    그 당시의 법례로는 연극 배우를 신성한 성지에 '일반적인 의식'으로 매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몰리에르의 아내 아르망드는 루이 14세에게 정상적인 장례식을 밤에 치를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1792년 그의 유해는 프랑스 기념 박물관에 옮겨졌고, 1817년 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Cimtière du Père Lachaise)로 이장되어 라 퐁텐 근처에 묻혔다.

    몰리에르가 죽은 뒤 그 극단은 다른 극단과 합병하여 1680년 국왕의 명에 의해 '코메디 프랑세즈(Comédie Française)'가 되었다. 오늘날 프랑스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가 '몰리에르의 집'으로 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몰리에르는 완전한 연극인으로서 당대의 최고 희극 연기자로 대우를 받았으며, 죽은 후 프랑스 연극사상 최대의 희극작가로 평가되었다.

    그는 종래의 단순한 희극에서 벗어나 예민한 관찰로 당시의 풍속을 무대 위에 재현시켰으며, 심리 발전을 토대로 하는 성격 묘사, 무대의 조화, 이성과 양식을 존중한 자연스럽고 힘찬 표현에 있어서 뛰어났다.

    자연스러움을 존중하고 그에 반하는 것은 골계화하는 태도는 희극의 장르에 있어서 고전주의를 대표하지만, 휴머니스트로서의 몰리에르는 인간은 세상을 앎으로 인해 성장한다고 믿어 관용을 역설하였으며 모든 위선에 대하여 건전한 분노를 터뜨렸다. 이 점에 몰리에르 작품은 영원한 생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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