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생애, 유년기, 말년과 죽음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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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셰익스피어의 생애, 유년기, 말년과 죽음
    인물 이야기 2017. 6. 21. 02:16

     

     

    셰익스피어의 생애, 유년기, 말년과 죽음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년 4월 26일~1616년 4월 23일)는 영국극작가, 시인이다. 그의 작품은 영어로 된 작품 중 최고라는 찬사를 받으며, 셰익스피어 자신도 최고의 극작가로 손꼽힌다. 그는 자주 영국의 "국민 시인"과 "에이번의 시인"으로 불렸다.

     

    유년기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 극작가로 불리고 있는 셰익스피어는 잉글랜드 중부의 영국의 전형적인 소읍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에서 출생하였다. 셰익스피어는 아름다운 숲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인구 2000명 정도의 작은 마을 스트랫퍼드에서 존 부부의 첫 번째아들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고, 이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비교적 부유한 상인으로 피혁가공업과 중농(中農)을 겸하였으며, 읍장까지 지낸 유지로 당시의 사회적 신분으로서는 중산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셰익스피어는 풍족한 소년시절을 보낸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1577년경부터 가운이 기울어져 학업을 중단했고 집안 일을 도울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학업을 중단하고 런던으로 나온 시기는 확실치가 않고 다만 1580년대 후반일 것으로 여겨진다.

    셰익스피어는 주로 성서고전을 통해 읽기와 쓰기를 배웠고, 라틴어 격언도 암송하곤 했다. 셰익스피어는 11세에 입학한 문법학교에서 문법, 논리학, 수사학, 문학 등을 배웠는데, 특히 성서와 더불어 오비디우스의 《변신》은 셰익스피어에게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 셰익스피어는 그리스어를 배우기도 하였지만 그리 뛰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셰익스피어와 동시대 극작가인 벤 존슨은 “라틴어에도 그만이고 그리스어는 더욱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면서 셰익스피어를 비꼬아내기도 하였다. 이 당시에 대학에서 교육받은 학식 있는 작가들을 ‘대학재사’라고 불렀는데, 셰익스피어는 이들과는 달리 대학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타고난 언어 구사 능력과 무대 예술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 다양한 경험, 인간에 대한 심오한 이해력은 그를 위대한 작가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다른이들과 다르게 뛰어난 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연 그 자체로부터 깊은 생각과 뛰어난 지식을 끌어모은 자로서 그 세대의 최고의 희곡가라고 불리고 있다.

    셰익스피어는 18세의 나이에 26세의 앤 해서웨이와 결혼했다. 우스터의 성공회관구(자치적이고 독립적인 지역 성공회 교회를 일컫는 말)의 교회 법정에서는 1582년 11월 27일에 혼인 허가를 내주었다. 해서웨이의 두 이웃은 결혼을 막을 아무런 장애 요인이 없음을 보증하는 보증서를 다음 날 보냈다. 셰익스피어의 생애에서 세례일과 결혼일을 제외하고 확실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셰익스피어와 앤 사이에서 1583년 5월 23일에 수잔나(Susanna)라는 딸이 탄생한다. 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황으로 보아 그리 늙은 신부가 아니었지만 셰익스피어가 연상의 아내를 그리 사랑한 것 같지는 않다. 연상의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든 개인적인 성공의 야심에서였든, 아니면 고향에 머무를 수 없을 만한 사고를 저질렀든, 셰익스피어는 1585년에 햄닛(Hamnet)과 주디스(Judith)라는 쌍둥이가 태어난 후 곧장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닌다. 1585년 이후 7∼8년간 고향을 떠나 떠돌아다녔는데, 이 기간 동안 셰익스피어가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1590년경에야 런던에 도착해 이때부터 배우, 극작가, 극장 주주로 활동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런던과 극작 활동

    런던에 이주한 셰익스피어는 눈부시게 변하고 있던 수도 런던의 모습에 매료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1558∼1603)이 통치하던 이 시기의 런던은 많은 농촌 인구가 유입되어 대단히 북적거리고 활기 넘치는 도시였다. 런던은 인구의 급격한 팽창으로 도시는 지저분해지고 많은 문제점이 야기된 도시였지만,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다양한 경제 활동, 다양한 문화 활동과 행사, 특히 빈번한 연극 공연은 많은 사람들에게 여흥을 제공하면서 셰익스피어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셰익스피어가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극작가 로버트 그린의 기록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적어도 1592년에는 런던에서 알려진 극작가 중 하나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로버트 그린은 셰익스피어가 대학도 마치지 못한 학력으로 인해 품격이 떨어지는 연극을 양산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1594년부터 셰익스피어는 당시 런던 연극계를 양분하는 극단의 하나였던 궁내부장관 극단의 전속 극작가가 되었다.

    1599년 궁내부장관 극단은 템스 강 남쪽에 글로브 극장을 신축하고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후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극단은 국왕 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셰익스피어는 이 극단에서 조연급 배우로서도 활동했으나 극작에 더 주력하였다. 그리고 이 기간을 전후해서 시인으로서의 재능도 과시하여 《비너스와 아도니스》(1593)와 《루크리스》(1594) 등 두 편의 장시(長詩)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극작가로서의 셰익스피어의 활동기는 1590년1613년까지의 대략 24년간으로 볼 수 있는데, 이 기간에 희·비극을 포함한 모두 38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590년대 초반에 셰익스피어가 집필한 《타이터스 안드로니커스》, 《헨리 6세》, 《리처드 3세》 등이 런던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는데, 특히 《헨리 6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셰익스피어에 대한 악의에 찬 비난도 없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학 교육도 받지 못한 작가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인기는 더해 갔다.1623년 벤 존슨은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셰익스피어뿐이라고 호평하며, 그는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668년 존 드라이든(John Dryden)은 셰익스피어를 “가장 크고 포괄적인 영혼”이라고 극찬한다. 셰익스피어는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10편의 비극(로마극 포함),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 몇 편의 장시와 시집 《소네트》를 집필하였고, 대부분의 작품이 살아생전 인기를 누렸다. 생전의 엘리자베스가 셰익스피어에 대한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국가를 모두 넘겨주는 경우에도 셰익스피어 한명만은 못 넘긴다." 이었다.

     

    말년과 죽음

    셰익스피어에 대한 첫 번째 전기를 출간한 작가 로우(Rowe)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몇 년전에 고향인 스트랫퍼드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나 당시에 모든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은퇴하는 일은 보기 드문 경우이었고, 말년에도 셰익스피어는 런던을 계속 방문하였다. 1612년 그는 마운트조이의 딸 메리의 혼인 신고와 관련하여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을 요구받았다. 1613년 3월 그는 과거에 런던 블랙프라이어스 소 수도원 이었던 문루(gatehouse)를 사들였고, 1614년 11월에는 내과 의사이자 그의 사위인 존 홀과 함께 몇 주간 런던에 머물러있었다.

    1606년에서 1607년을 지나면서 셰익스피어는 몇 편 안되는 희곡을 썼으나 1613년 이후에는 그의 창작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 그가 마지막으로 쓴 세 편의 희곡은 아마도 극작가인 존 플레쳐와 함께 창작한 것으로 보이며, 존 플래쳐는 셰익스피어의 뒤를 이어 왕의 부하들을 위한 실내극을 창작한 인물이었다. 셰익스피어는 1616년 4월 26일에 세상을 떠났다. 유족으로는 그의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수잔나는 내과의사인 존 홀과 1607년에 결혼하였으며, 쥬디스는 셰익스피어가 죽기 두 달 전에 포도주 제조 업자인 토마스 퀸네이와 결혼하였다.

    자신의 뜻에 따라 셰익스피어는 갖고 있던 많은 부동산을 큰딸인 수잔나에게 물려주었다. 유언장에 따르면 그녀는 그 재산을 온전히 보전하여 "그녀의 몸에서 낳은 첫 아들"에게 상속해야 했다. 둘째 사위인 퀸네이는 세 자녀가 있었으나, 모두 결혼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수잔나의 남편이자 첫째 사위인 홀에게는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지닌 자녀가 한 명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두 차례 결혼하였지만 1670년에 자녀를 남기지 못한 채로 세상을 떠났다. 이로써 셰익스피어의 직계는 대가 끊기게 되었다. 셰익스피어는 유언에서 당시 법에 따라 아마도 자신의 재산 중 3분의 1을 물려받을 상속권이 있었을 아내 앤에 대해서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한 마디를 남겼는데, 그것은 자신이 그녀에게 "나의 두 번째 좋은 침대"를 물려준다는 것이었다. 셰익스피어가 언급한 침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난무하였다. 일부 학자는 언급된 그 침대가 실제 물건이 아니라 앤에게 모욕을 주려고 한 말이라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진짜 그러한 침대가 있었고 따라서 그것은 의미있는 유산이었으리라고 믿는다.

    셰익스피어는 죽은 뒤에 고향의 성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에 묻히게 된다.

    그의 흉상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판단은 네스터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 예술은 버질과 같은 사람. 대지는 그를 덮고, 사람들은 통곡하고, 올림푸스는 그를 소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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