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잭슨, 팝 레코딩의 교과서,팝 사운드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고 평가를 받다.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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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클 잭슨, 팝 레코딩의 교과서,팝 사운드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고 평가를 받다.
    음악 이야기 2017. 7. 26. 16:38

     

    마이클 잭슨, 팝 레코딩의 교과서,팝 사운드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고 평가를 받다.

     

    마이클 조셉 잭슨(영어: Michael Joseph Jackson, 1958년 8월 29일 ~ 2009년 6월 25일)은 팝의 황제로 불리는 미국의 가수, 작곡가, 음악 프로듀서, 무용가, 배우, 그리고 자선가다. 음악, 춤, 패션에 대한 그의 공헌은 그의 사생활과 함께 그를 40년이 넘게 대중문화의 세계적 인물로 만들었다.

    잭슨 가족의 8번째 자식인 마이클은 1964년 형제인 재키, 티토, 저메인, 말론과 함께 잭슨 파이브로 데뷔했다. 1971년에 솔로 활동을 시작한 잭슨은 1980년대 초 대중음악에서 주목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의 1982년 앨범 《Thriller》의 수록곡 〈Beat It〉, 〈Billie Jean〉, 〈Thriller〉등의 뮤직 비디오는 인종적 장벽을 깨고, 매체의 예술 형식과 홍보 수단에 혁명을 가져온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디오의 인기는 TV 채널 MTV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잭슨의 1987년 음반 《Bad》는 수록곡인 〈I Just Can't Stop Loving You〉, 〈Bad〉, 〈The Way You Make Me Feel〉, 〈Man in the Mirror〉, 〈Dirty Diana〉가 모두 미국 빌보드 핫 100 싱글의 정상에 올른 기록을 세운 첫 음반이 되었다. 그는 1990년대 동안, 〈Black or White〉와 〈Scream〉과 같은 영상으로 혁신을 계속했고, 투어를 도는 솔로 가수로서 명성을 쌓았다. 무대와 영상 퍼포먼스를 통해 잭슨은 로봇문워크와 같은 수많은 복잡한 춤 기술을 대중에게 널리 알렸다. 그의 독특한 사운드와 스타일은 다양한 음악 장르의 수많은 아티스트에게 영향을 미쳤다.

    역사상 가장 성공한 엔터테이너라는 기네스북 기록과 함께 잭슨의 정규 앨범 《Thriller》는 65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려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총 31개의 기네스북 기록을 남겼으며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년대 동안 꾸준히 빌보드 TOP 10 안에 든 유일한 가수로 그의 솔로 경력으로는 총 13개의 빌보드 1위곡을 남겼으며 밴드 시절까지 합치면 17개의 빌보드 1위곡을 남겼다. 잭슨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두 번 헌액된 몇 안되는 음악가 중 한 명이며, 그래미 어워드에서는 13개의 상과 35세의 나이로 살아있는 전설 상을 수상했다. 작사/작곡 능력을 인정받아 2002년 작사/작곡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으며 춤에 끼친 공로를 인정받아 팝과 록을 겸비하는 뮤지션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국립 무용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또한, 인종차별을 부숴 유색인들의 인권신장을 이뤘다는 공로로 상을 받았다. 잭슨의 음악은 시대를 앞서간 사운드로 구성되어 엔지니어들은 이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잭슨의 외적 변화, 개인적 인간 관계, 행동 등 사적인 부분은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로 민사소송을 당했고 법정 외 합의로 민사소송은 종결됐다. 형사 수사는 증거 부족으로 불기소 처분됐으며 잭슨에게 민사소송을 건 이반 챈들러는 2009년 11월 5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2005년에도 아동 성추행 혐의에 연루돼 재판을 받았지만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This Is It이라는 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컴백을 준비하고 있던 중 2009년 6월 25일 프로포폴벤조디아제핀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인해 사망했다. LA 경찰은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고, 머레이는 2급 살인죄로 2011년 9월 유죄 판결을 받는다. 잭슨의 죽음은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추도식은 각국 방송국을 통해 생중계 되었다. 'Global Language Monitor'가 실시한 조사에 의하면 마이클 잭슨의 죽음은 지난 수십년간 유명인들의 죽음 중 가장 큰 반응을 불러온 것으로 나타났다.

     

    사망

    200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콘레드 머레이에 의한 정맥 주사 투입으로 인한 급성 프로포폴 중독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2시 22분 911을 부르고 의료진과 구급대원들이 3분 만에 잭슨의 맨션으로 출동했다. 주치의는 마이클 잭슨에게 법정에서 2.5ml의 프로포폴을 주입했다고 말했으나, 그의 집에서 다쓴 프로포폴 100ml 병이 발견되었다.

    1시 13분 인근 병원인 Ronald Reagan UCLA Medical Center로 이송된다. 2시 26분 병원관계자는 잭슨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는 여자친구와 지인에게 약 40분가량 통화한 뒤 911에 신고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었던 김대중은 6월 26일 외신을 통해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라며 마이클 잭슨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한국의 민주당은 26일 한국의 통일을 기원한 잭슨의 사망을 애도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언론에서는 잭슨의 죽음에 대해 근거없는 추측을 했다. 타블로이드지의 주사바늘,자살,슈퍼 박테리아,피부암,성형 후유증 보도 등이 이어졌지만 부검 결과 마이클 잭슨은 사망 당시 50세 미국인의 건강에 비춰봤을 때 건강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잭슨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뉴스 웹사이트는 사용자 폭주로 빠르게 과부하에 걸린다. 잭슨의 사망 소식을 최초 보도한 TMZ와 뉴욕타임즈는 서버 폭파 현상을 겪었으며, 구글은 마이클 잭슨 검색어 량이 수백만씩 폭등하자 DDoS 공격으로 간주하고 30분동안 마이클 잭슨 관련 검색을 차단했다.

    7월 7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그의 장례식이 거행됐다. 장례식에는 자넷 잭슨, 스티비 원더, 스모키 로빈슨, 어셔, 라이오넬 리치, 제니퍼 허드슨, 저메인 잭슨 등이 참석했으며,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이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미국 내에서 실시간 중계됐으며 총 시청자 수는 3110만명으로 로널드 레이건웨일스 공작부인 다이애나 다음으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장례식이 됐다. 또한 잭슨의 딸인 패리스 마이클 캐서린 잭슨은 아빠는 최고였으며 정말 사랑한다고 추도사를 읽었다. 9월 13일에는 마돈나가 'VMA'에서 황제여 영원하라며 잭슨을 추모했다.

    9월 3일, 사망 70일 만에 글렌데일의 포리스트론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12월 28일 AP통신미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2009년 10대 연예뉴스를 선정한 결과 잭슨의 죽음은 1위를 차지했다. AP는 "팝의 역사에서 가장 중대하고 충격적인 죽음"이라고 뒷붙였다.

    2010년 1월 11일, LA카운티 검시소에서 마이클 잭슨에 대한 검시기록의 일부를 공개했다. 이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의 사인이 타인에 의해 주사 된 정맥내의 과량의 프로포폴 및 약물에 의한 살인 (Homicide) 으로 명시됐다.

    2011년 1월 25일 LA지방검사보 데이비드 월그렌은 마이클 잭슨의 주치의 콘래드 머레이를 2급 살인죄로 기소했다. 2011년 11월 7일 콘레드 머레이는 유죄 판결을 받는다.

    2014년 'YouGov'라는 유명 여론조사 업체에서 미국인에게 마이클 잭슨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의 61%가 잭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며 응답했다. 32%는 비호감을 표시했다. 이는 11년 전인 2003년 갤럽의 여론조사인 호감 18% 비호감 65%와는 상반되는 결과다.

     

    사후

    10월 28일 영화 마이클 잭슨의 디스 이즈 잇이 2주동안 개봉되었다. 영화는 빠른 속도로 매진됐으며 특히, 영국에선 티켓 판매 역사상 가장 빨리 많이 팔린 기록을 세웠다. 동명의 앨범인 This Is It이 같은 해 10월 26일에 발매됐다. 또, 이 앨범에 실린 싱글인 'This is it'이 발매됐으며, 빌보드차트에서 앨범은 1위, 싱글은 43위에 머물렀다. 2009년 12월 24일 미국 FBI는 마이클 잭슨에 대한 수사 파일들을 공개했다. 여기에는 살해 협박 편지등을 포함해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수사 파일들도 들어있다. 이 정보 공개를 통해 그가 아동 성추행에 혐의가 없음을 다시 확인하게 됐다.

    2010년 2월 52번째 그래미 어워드에서 '평생 공로상'을 아들과 딸이 대리수상 받는다. 2010년 11월, 에픽 레코드와 마이클 잭슨 재단은 그의 첫 사후앨범인 《Michael》를 발매한다. 첫 싱글은 지난 2007년과 2008년에 R&B 가수인 에이콘과 작업했으나, 유출됐던《Hold My Hand》가 첫 싱글이다. 빌보드 200 3위를 기록했다. 수록된 몇몇 곡은 마이클 잭슨의 목소리가 맞는 지에 대한 논란 또한 벌어졌다.

    2013년 5월 '웨이드 롭슨(Wade Robson)'이라는 댄서가 마이클 잭슨의 1조 이상 부동산에 대해 보상 청구권을 냈다. 롭슨은 2011년 신경쇠약으로 쓰러진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도중 억압된 기억이 해방돼 잭슨에게 성추행 당한 기억이 생각났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2015년 5월 26일 미국 LA 대법원이 근거가 없다고 기각함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이 시기를 틈타 타블로이드 언론들은 사실 확인되지 않은 정보를 퍼뜨렸다.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기사에 마이클 잭슨 유산 관리원 측은 '당신들이 본 타블로이드 기사는 사실이 아니며 마이클로 이익을 얻기 위한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매우 혐오한다. 팬들이 우리와 함께 마이클의 업적을 보호하는데 함께 했으면 좋겠다' 고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CNN에서는 타블로이드 언론들의 보도를 직접 반박했다.

    2014년 5월 사후 잭슨의 미발표곡을 모은 앨범《Xscape》가 발매된다. 잭슨의 미공개 작업물에 자유 열람 권한을 가진 에픽 레코드의 대표이자 CEO인 엘 에이 리드(L.A. Reid)를 통해 1983년부터 1993년 사이에 녹음된 총 8곡이 수록된다. 그 중 5월 2일 아이튠즈를 통해 선공개된 첫 싱글 《Love Never Felt So Good》은 공개 24시간만에 차트 5위권에 올랐을 뿐 아니라, 17개국에서 1위를 석권하고 67개국에서 5위권 안에 진입했다. 이로써 이 싱글은 잭슨의 통산 49번째 HOT 100 차트 진입곡이 됐다. 앨범은 발매와 동시에 49개국 아이튠즈에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으며 빌보드 200에서 2위를 기록했다. 《Love Never Felt So Good》은 빌보드 9위에 올라 마이클 잭슨은 50년대에 걸쳐 빌보드 TOP 10에 진입한 유일한 가수가 됐다. 2015년 1월 11일 기준으로 이 앨범은 1,523,000장이 팔린 것으로 집계됐으며 이는 2014년 판매된 앨범 중에서 14위에 해당되는 판매량이다.

    5월 19일 열린 2014 빌보드 뮤직 어워즈에서는 마이클 잭슨의 홀로그램 퍼포먼스를 공개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돌아온 마이클 잭슨은 16명의 댄서들과 춤을 선보였으며 문워크를 선보인다. 1년이 넘는 준비기간과 100여 명의 스태프들이 동원됐다.

    마이클 잭슨의 네버랜드가 콜로니 캐피털에 의해 매각될 것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마이클 잭슨의 유산 관리원은 이같은 소식에 매우 낙담스럽고 슬프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마이클 잭슨은 2008년 콜로니 캐피털과 네버랜드 합작투자를 위해 계약을 체결하였는데 콜로니 캐피털이 투자를 하면 할수록 콜로니 캐피털이 소유하는 지분은 늘어난다. 지난 6년 동안 콜로니는 네버랜드의 500억 이상을 투자한 것으로 추정되며 네버랜드를 매각할 수 있는 권리 또한 가지게 됐다.

    마이클 잭슨의 사후 소득이 1억 달러 이상이라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는 생존 가수들보다 훨씬 높은 것으로 그의 인기와 상업성이 죽어서도 끝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2015년 12월달 'Thriller' 앨범은 RIAA에서 3000만장 판매(30X platinum)을 인증받았다. 미국 내 최초 3000만장 판매 앨범이라는 신기록을 세운 것이다

     

    영향력

    대중음악계의 혁명을 불러왔다. 영국 연구진이 빌보드 핫 100에 오른 1만 7천개의 곡을 분석한 결과 대중음악계는 1964년,1983년,1991년 총 3차례의 혁명을 맞이했으며 잭슨은 1983년 혁명기를 수놓은 대표적 팝스타로 조사됐다.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주역이다. 달에서 유영하는 것 같은 브레이크 댄스와 문워크 그리고 200개의 영화 장면을 응용하여 만든 안무인 'Dangerous' 빌리 진과 'Beat it' 스릴러 뮤직비디오 등은  많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 잡았으며 이는 현대 가수들에게 교과서적인 역할을 했다. 잭슨은 음반산업에서 독립적인 상품으로 뮤직비디오를 여는 첫 신호탄이었으며 대중음악을 '연예사업'으로 물꼬를 돌린 주인공이자 스타 이미지의 중요성을 알렸다. 잭슨의 공연은 항상 새로운 시도들로 가득했으며, 투어 공연에는 처음으로 뮤지컬 개념을 도입했다. 메이저 가수로서 아시아 주요 국가에서 투어 공연을 한 것도 잭슨이 처음이며 새로운 장비도 집으로 끌어들여와 사용하는 혁신적 시도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러한 시도들은 많은 가수들에게 영감을 줬다. 'Off the Wall'은 모타운의 훵크 사운드를 하드록 기타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증명했고 'Thriller'와 'Bad (음반)'는 MTV가 팝시장의 주류 매체가 되도록 기여했다고 평가받는다. 이런 흐름은 지금 21세기에도 유효하며 한국의 주류 댄스 가요는 마이클 잭슨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한다. 빌보드는 마이클 잭슨을 음악계의 제일 위대한 혁신가이자 제일 사랑받는 퍼포머라고 규정했으며 "아마도 그 어떤 뮤지션도 음악 산업에 마이클 잭슨보다 커다란 임팩트를 남기진 못했을 것이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엔터테이너다. 그의 쇼트필름 “스릴러”에서 보이듯이 그의 획기적인 시각 효과와, 스토리라인, 그리고 복잡한 춤 동작들은 뮤직비디오를 예술 형식으로 바꿔놓았다. 마이클의 독창적인 쇼트 필름의 충격은 뮤직비디오의 예술성을 대중 문화 속에 집어넣는걸 도왔고, 이는 음반 산업에 깊이 효과적인 홍보 수단을 만들어주었다. 활동기간동안 마이클은 “로봇춤”과 “문워크”같은 복잡한 춤 테크닉 여러가지를 유행시켰으며, 심지어 반중력 동작을 해내기 위해 특별 신발을 디자인하여 특허를 내기도 했다. 그의 쇼트 필름들에서 보이는 화려한 이미지와 무대 효과 연출을 통해, 잭슨은 힙합, 컨템포러리 R&B, 팝, 로큰롤에 있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아직까지도 계속 영향을 주고 있는 라이브 무대 퍼포먼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라고 평가했다.

    댄스대중화에 공헌을 했다. 1974년 'Soul Train'에서 J5의 일원으로 출연해 로봇춤을 유행시켰으며, 뒷골목에서 흑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브레이킹 댄스를 공중파에서 선보여 전국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 'Thriller'와 'Beat it'의 뮤직비디오에서 최초의 집단군무를 선보였고 이는 뮤직비디오의 고전이자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뛰어난 노래에 몸을 맞춰 추는 그의 모습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으며 잭슨의 춤을 본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기 위해 댄서에 도전했다. 잭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후 많은 유명 댄서들은 잭슨에게 큰 영향을 받았으며 춤의 아버지를 잃었다고 애도를 표했다.

    음악계의 흑백 장벽을 허물었다. 방송국들의 인종차별 정책을 돌파했고 잭슨의 성공으로 흑인 뮤지션들의 음악계 진출에 활로가 생겼다. 잭슨의 성과는 흑인을 포함한 유색 인종들에게 자신감과 긍지를 부여했다. 잭슨은 'Thriller' 로 대성공을 거두고 당당히 타임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했다. 타임은 잭슨이 흑인을 음악의 주류로 올려놨다고 평가했다. 잭슨은 20세기 미국의 영웅이라는 소리도 들었으며 유색인들의 인권신장에 기여했다는 공로로 유색인 지위향상협회(NACCP Image Award)에서 상을 받는다. 유명 농구 선수 매직 존슨은 흑인을 위해 수많은 문을 열어줘서 감사하다고 애도를 표했으며 마틴 루터 킹 2세의 아들 마틴 루터 킹 3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훌륭히 해낸 최고의 엔터테이너라고 마지막 인사를 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알 샤프턴 목사는 "잭슨은 타이거 우즈,오바마,오프라 윈프리에 앞서 유색인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라고 회고했다.

    팝 레코딩의 교과서,팝 사운드의 새 기준을 제시했다고 평가를 받는다. 정일영 음악평론가는 잭슨의 음반 사운드는 현대음악의 기준으로 불려도 될 만큼 충실하며 스테레오 효과를 극한까지 올린 팝 레코딩의 교과서이며 엄청난 완성도를 보여주는 그의 음악 세계는 그냥 팝이라고 흘리기에는 음향 엔지니어로서 배울 점이 너무나 많다고 평가했다. 유명 음악 평론가인 임진모는 잭슨의 앨범은 사운드가 뛰어나 옛날 스튜디오 엔지니어 책상에는 항상 잭슨의 앨범이 꽂혀있었다고 한다. 또한 "비트 감각이 없으면 댄스음악을 소화하기 어렵다. 타고난 비트감각을 소유하고 있었고 소리에 대한 민감성이 사상 최고라고 할 정도로 사운드에 완벽성을 추구한 가수였다" 라고 평가했다.

    패션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마이클 잭슨은 스키니 진 페도라 썬글라스 장갑과 재킷 팔찌 암밴드 한쪽을 자른 티셔츠 등 다양한 패션을 유행시켰다. 이런 영향력은 그 어떤 톱스타도 잭슨을 따라올 수 없었다. 일부 학교에서는 잭슨의 패션을 따라하지 못 하게 하려고 규칙까지 제정했다.패션의 황제라는 평가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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