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의 성장기, <1984>집필 당시 :: 예술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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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 오웰의 성장기, <1984>집필 당시
    인물 이야기 2017. 6. 15. 16:12

     

    조지 오웰의 성장기, <1984>집필 당시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라는 필명으로 널리 알려진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 1903년 6월 25일 ~ 1950년 1월 21일)는 인도에서 태어난 영국 작가이자 언론인이다. 명료한 문체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과 민주사회주의에 대한 지지를 표한 것으로 이름나 있다.

    오웰은 문학 평론, , 평론, 소설과 같은 작품을 남겼으며, 《동물 농장》(1945년)과 《1984년》(1949년)으로 특히 유명하다. 논픽션 작품 중에는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년), 《카탈로니아 찬가》(1938년) 등이 있다. 2008년 《타임스》는 1945년 이후 위대한 영국 작가 50선에 2위로 조지 오웰을 꼽았다. 반공주의자로 잘못 알려져있으나 아나키스트 계열의 사회주의자중 한명이다.

    조지 오웰의 작품들은 오늘날에도 대중 문화와 정치에 영향을 주고 있다. 조지 오웰이 만든 신조어빅 브라더, 사상 경찰(思想警察, Thought Police), 신어, 이중 사고(二重思考, doublethink)와 같은 언어와 그가 예견한 냉전 체제 등은 여전히 영향력있는 개념이다.

    조지 오웰은 1950년 1월 21일에 오랫동안 앓아 온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장기

    에릭 아서 블레어는 1903년 6월 25일에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영국령 인도벵갈(오늘날 비하르 주)에서 태어났다. 증조부 찰스 블레어는 부유한 젠트리토머스 페인 백작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의 주요 수입원은 자메이카의 플랜테이션 농장이었다. 할아버지 토머스 리처드 아서 블레어는 성직자이었다. 젠트리 신분은 세대를 걸쳐 상속되었으나 제물은 그렇지 못하여 에릭은 자신의 집안을 "상류 중산층의 하층"이라고 표현하였다. 에릭의 아버지인 리처드 월머슬리 블레어(Richard Walmesley Blair)는 인도 식민국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었고, 어머니 이다 블레어(Ida Mabel Blair)는 에릭이 두 살이 되던 해 그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생가는 비하르 주의 역사 유적으로 지정되었다.

    에릭은 어머니 이다와 함께 옥스포드셔헨리온템즈에 정착하였다. 아버지가 3개월간 영국에 돌아왔던 1907년을 제외하면 1912년까지 가족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에릭에게는 마조리라는 이름의 누나와 에이브릴이라는 이름의 여동생이 있었다. 1905년에 쓰인 어머니의 일기에는 활발한 사회 활동과 예술에 대한 관심이 보인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에릭의 가족은 옥스포드셔의 쉽레이크로 이주하였다. 에릭은 여기서 버디컴 집안과 어울렸는데 특히 딸인 제신타 버디컴(Jacintha Buddicom)과 친하게 지냈다. 이들의 우정은 이후로도 계속하여 이어졌고, 1974년 제신타는 이 때의 일을 적은 《에릭과 우리들》을 출간하였다.

     

    에릭은 다섯살이 되어 헨리온템즈의 수녀원 부속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곳은 1903년 이후 프랑스에서 종교 교육이 금지되자 영국으로 건너 온 우르술라 수녀회가 운영하는 로마 가톨릭 계열의 학교였다. 어머니 이다는 에릭을 퍼블릭 스쿨에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러기엔 학비가 부담이 되었다. 이다의 형제인 찰스 리무진이 이스트서식스에 있는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을 추천했는데 프로 골퍼였던 리무진은 그 학교 교장과 몇 차례 골프를 친적이 있었다. 학교 교장은 학비의 절반을 감해주기로 하고 에릭을 입학하도록 하였다. 1911년 에릭은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에 입학하였고 집에는 방학 때에만 갔다. 그는 등록금 이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학교에선 에릭이 "가난한 집안"이란 소문이 번졌다. 그는 훗날 회고록 〈정말, 정말 좋았지〉(Such, Such Were the Joys)에서 학교가 싫었다고 썼다. 에릭은 이 학교에서 사이릴 코널리와 친구가 되었다. 코널리는 많은 해가 지나 《호라이즌》의 편집장이 되었고 조지 오웰의 여러 에세이를 잡지에 수록하였다.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서 자신의 가족에 대해 묘사하기를 '상류 중산층의 하급 계층'(lower-upper-middle class)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세인트 시프리언즈 스쿨을 다니는 동안 에릭은 헨리온템즈의 지역 신문인 《헨리 앤 사우스 옥스퍼드셔 스탠다드》에 두 편의 시를 기고하였다. 에릭은 코널리와 함께 할로우 스쿨이 지급하는 할로우 역사 장학급 2등급에 선정되었다. 이로서 윌링턴 스쿨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지만 이튼 스쿨에 들어가고 싶었던 에릭은 이튼 스쿨의 결정이 있을 때까지 세인트 시프리언즈에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다. 에릭은 1916년 12월까지 세인트 시프리언즈에 있었다.

    1917년 1월 에릭은 웰링턴 스쿨로 옮겼다. 그러나 5월에 이튼 스쿨에서 입학 허가서가 도착하자 이튼으로 옮겼다. 에릭은 1921년까지 이튼 스쿨에 다녔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 버디컴에게 웰링턴이 "더럽다"고 말했고, 이튼은 "흥미롭고 행복한 곳"이라고 평가했다.당시 이튼 스쿨의 교장은 엔드류 시든햄 페러 고우로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우쉽 교수였다. 그는 에릭의 진로를 조언하는 편지를 써 주었다. 에릭은 당시 이튼 스쿨을 함께 다니고 있던 올더스 헉슬리, 스테번 런시먼과 같은 이들에게서 간략한 프랑스어를 배웠다. 사이릴 코널리가 에릭을 쫓아 이튼 스쿨에 왔지만 몇 해 동안 해어져 있었던 이유로 관계는 소원해졌다.

    이튼에서의 그의 학업에 대한 평가는 바보 같은 학생이었다는 것과 훌륭한 학생이었다는 것이 공존하고 있다. 자신들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분개하는 몇몇 교사를 에릭은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훗날 조지 오웰을 필명으로 사용한 뒤 쓴 〈정말, 정말 좋았지〉에서 에릭은 학창 시절 동안 학교가 가르친 것은 단순한 암기식 수업이며 그 속에서 자신은 계급 차별로 인한 따돌림을 당했다고 썼으며 이튼의 교육에 대해 '(아는 척 할 줄 아는) 신용 사기를 향한 과감한 준비'만을 시켰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는 약하고 못생겼다는 것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스스로를 실패한 인생으로 생각했다. 어려서 형성된 실패한 인생이라는 감각은 그가 평생 동안 가졌던 것이었다. 에릭을 직접 만나본 사람들은 그가 추남이었으나 맑고 푸른 눈을 가졌다고 회고한다.

    결국 그가 이튼을 졸업할 무렵에는 167명중 138등을 할 만큼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는 이튼 스쿨에서 로저 마이너스와 함께 대학 잡지를 편집하는 일을 하였고, 대학 진학 선발 시험인 킹스 스콜라를 통과하였지만 부모의 형편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릭은 이튼에서 훗날 자신의 지기들이 되는 친구들을 몇몇 사귀었다. 그중 싸이릴 코놀리는 잡지 '호라이즌'의 편집자가 되어 오웰의 유명한 에세이 대부분을 출간해주었다. 훗날 오웰은 상당한 자율을 허용했던 이튼스쿨 시절을 '그런대로' 행복했다고 회고했지만, 입학 후 공부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신경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이튼의 생활에 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그가 제국주의와 영국의 식민정책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은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아버지처럼 식민 관료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이튼의 교육은 학생들을 식민 관료, 군인, 제국주의자로 만드는 것이었고, 아직 에릭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런시먼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에릭 블레어가 동양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썼다. 에릭의 아버지는 서퍽의 사우스월드에서 퇴임하였고, 가족은 에릭이 인도의 제국 경찰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1984년》집필

    1946년 이후 말년까지 조지 오웰은 언론인으로서 《트리뷴》, 《옵저버》, 《맨체스터 이브닝 뉴스》 등에 칼럼을 기고하였다. 그러는 사이 오웰은 전쟁 시기 발표하였던 에세이들을 모아 단행권 《비판적 에세이》를 발행하였다.

    아일린이 사망한 뒤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했던 오웰은 세명에게 청혼을 해보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그 중에는 소냐 브라우넬도 있었으며 그녀는 이후 모리스 메를로퐁티와 연애를 했지만 오래가진 못한다. 《동물 농장》으로 유명 작가가 된 오웰은 런던이 싫어져 1946년에 스코틀랜드 주라 섬으로 이주했다.

    여동생 에이브릴의 도움으로 양자 리처드를 자연 속에서 키우면서 《1984년》을 집필하기 시작해 1947년 말에 탈고했지만 폐결핵으로 한동안 요양해야 했다. 폐결핵의 악화는 그의 심신을 탈진시켰고, 정맥류성 궤양을 앓고 있는 소설 속 주인공 윈스턴의 처지로 대변되어 나타난다. '만약 병이 그렇게 심하지만 않았다면 이 소설도 그다지 어둡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혔듯이 그의 저서 가운데 가장 위트가 없는 책이 되었다. 소냐 브라우넬의 힘차고 밝은 이미지는 《1984년》의 줄리아로 표현되었다. 1948년 11월에 최종 탈고한 오웰은 1948의 48을 뒤집어 1984년이라고 제목을 붙였다.

    메를로퐁티와 어긋난 소냐는 걸작을 내놓은 오웰에게 돌아왔다. 오웰은 다시 폐결핵으로 입원했고 병상에서 소냐 브라우넬과 1949년 10월에 결혼하였다. 소냐의 간호를 받으며 오웰은 다시 회복되어 작품 활동을 하길 바랐지만 두 달 뒤에 숨을 거두었다.

    삶의 소박한 것들을 사랑해왔던 오웰은 그것이 박탈된 근미래를 묘사하여 전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충격적인 이미지로 묘사하였다. 《1984년》은 출간 즉시 고전이 되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1984년》 안에는 언론인으서 겪은 그의 경험들이 녹아 있다. 예를 들어 101호실은 BBC에서 그가 근무하던 방의 번호에서 따왔다. 또한, 그가 오랫동안 보고 겪었던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참상에 대한 비판이 이야기 전체를 관통한다. 조지 오웰은 1943년 12월에 있었던 테헤란 회담의 경과를 보면서 세계가 초강대국과 그들의 영향권으로 재편되는 것을 직감했다. 로저 센하우스는 1948년 조지 오웰이 보낸 편지를 통해 그가 이 장면을 "잊히지 않을 소설의 핵심에 각인"하였다고 회상하였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내전 당시 참전 경험에서 코민테른의 공산주의자들의 교조적 행동이 오히려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즘과 같은 전체주의적이란 것을 발견하고 《카탈로니아 찬가》를 저술한 바 있다. 오웰은 자신이 겪었던 참호전, 식량배급에 대한 경험과 스탈린의 강제노동수용소, 미국의 핵폭탄 투하 등을 보면서 냉전 세계에 대한 비관적 전망을 책에 담았다.

    또한 조지 오웰은 《1984년》에서 철저한 감시에 놓인 전체주의 사회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전체주의가 어떻게 언어를 통하여 상징을 조작하는지 주목하였다. 그는 책의 부록으로 책에서 사용된 〈신어의 원리〉를 설명하면서, 당시 이미 사용되고 있던 각종 축약어, 이를 테면 나치, 코민테른, 인프레코르와 같은 언어에 대해 경고 하였다. 오웰은 국제 공산당(International Communist Party)는 마르크스, 파리 코뮌, 인터네셔널과 같은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이 떠오르지만 코민테른(Comintern, Communist International)이라는 말에서 떠오르는 것은 엄격히 짜여진 단체, 명백히 정의된 강령체만이 떠오를 뿐이라고 일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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